항목 ID | GC40020354 |
---|---|
한자 | 城郭 |
영어공식명칭 |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박성현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 있는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전통 시대의 방어 시설.
[개설]
전근대 동아시아의 정주(定住)[일정한 지역에 기반을 두고 거주] 사회에서는 일찍이 취락을 둘러싼 방어 시설이 나타났다. 국가가 발생한 뒤에는 특히 왕이나 제후가 거주하는 곳, 지방관이 파견된 곳 등에 성을 쌓아 보호하였다. 이때 성벽은 지배자의 치소(治所)[옛 지방관청]만을 둘러싸는 경우도 있고, 백성들의 거주지까지 둘러싸기도 한다. 구조물로서 성을 흔히 성곽(城郭)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성(城)은 내성(內城), 곽(郭)은 외곽(外郭)을 말한다.
영역 국가[성읍국가들이 연합해서 성립된 연맹왕국]가 등장하면서 경계에 장성(長城)을 쌓거나 관(關)을 설치하는 방식, 즉 영역 전체를 보호하는 방식도 나타나게 된다. 또는 중요한 길목에 군사 요새를 설치하여 적군이 내지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 채용되기도 하였다. 이상의 경우에서 장성이나 관을 제외하면 성벽은 특정 공간을 둘러싸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성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총체적으로 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 성곽]
대구광역시 동구에도 다수 성곽이 남아 있다. 대구광역시 지역의 성곽에 대한 정보는 조선 전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대구도호부 성곽조와 고적조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성곽조에는 달성(達城)이, 고적조에는 공산성(公山城)과 성불산고성(成佛山古城)이 수록되어있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 읍지에서는 몇 개 성곽을 더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자료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가 있는데 달성군의 경우 20개의 성지(城址)를 확인해서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중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것으로는 해안면 도동의 성지[용암산성], 해안면 봉무동의 성지[봉무토성]이 있다. 해방 후 대구광역시 지역의 성곽에 대한 전체적인 조사는 1989~1990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모두 8개 성곽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중 동구에 있는 것은 봉무토성과 용암산성이다. 개별 성곽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상을 종합하면 대구광역시 동구의 성곽으로는 봉무토성, 용암산성, 공산성 정도를 포함할 수 있다. 공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대구도호부의 고적으로 분류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와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성봉[팔공산 제2봉, 해발 1,175m]에 있다. 봉무토성과 용암산성은 대구광역시 동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구 해안현(解安縣)[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일대]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해안현은 원래 치성화현(雉省火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바꿨으며, 장산군(獐山郡)[현 경상북도 경산시]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고려 때에는 경주의 속현이었다가 결국 대구의 속현이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대구도호부의 해서촌(解西村), 해북촌(解北村), 해서부(解西部), 해동촌(解東村) 등의 면(面)으로 편제되었다. 고지도를 통해 봤을 때 그 중심지는 해서부면, 즉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 도동, 입석동, 불로동, 봉무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봉무토성은 고대로부터 치성화현, 해안현과 관련이 있다. 봉무토성은 낮은 구릉 위에 있는데 조사 과정에서 와질토기(瓦質土器)[철기시대 토기의 한 종류로 주로 회색빛을 띰]가 수습되어 원삼국시대 말, 대체로 삼한 단계부터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용암산성은 해안현의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높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비상시에 활용한 산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