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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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興遠 |
영어공식명칭 | Choe Heungwon |
이칭/별칭 | 흥원(興源),태초(太初),여호(汝浩,백불암(百弗庵),수구암(數咎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출생 시기/일시 | 1705년 2월 15일 - 최흥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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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39년 - 최흥원 「부인동동약」 시행 |
활동 시기/일시 | 1770년 1월 - 최흥원 『반계수록』 교정 |
활동 시기/일시 | 1784년 - 최흥원 세자익위사익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786년 8월 22일 - 최흥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90년 1월 29일 - 최흥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789년 - 최흥원 효행으로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짐 |
추모 시기/일시 | 1820년 - 최흥원 동천서원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711년 - 최흥원 불천위 제향 |
출생지 | 최흥원 출생지 - 대구광역시 북구 |
수학|강학지 | 최흥원 강학지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
수학|강학지 | 최흥원 강학지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
외가|처가 | 최흥원 외가 - 대구광역시 북구 |
외가|처가 | 최흥원 처가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
묘소|단소 | 최흥원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사당|배향지 | 최흥원 사당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사당|배향지 | 최흥원 배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학자|효자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경력 | 세자익위사익찬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배향된 학자이며 효자.
[개설]
도덕과 학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를 행하여 조정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대구 칠계(漆溪)에 살았으므로 세상에서 칠계 선생(漆溪先生)이라 하였다.
[가계]
최흥원(崔興遠)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초명은 흥원(興源), 자는 태초(太初), 초자(初字)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 별호는 수구암(數咎庵)이다. 최흥원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후손으로,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㠎)의 5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郎)을 지낸 최경함(崔慶涵)이며, 할아버지는 광양 현감을 지낸 최수학(崔壽學)인데 현감 재직 시 선정을 하여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최정석(崔鼎錫)이고, 어머니는 진사 조숭(趙崈)의 딸인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부인은 수군절도사 손명대(孫命大)의 딸인 일직손씨(一直孫氏)인데 아들은 최주진(崔周鎭)이고 딸은 이경록(李經祿)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최흥원은 ‘백불지 백불능(百弗知 百不能)[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에 능하지 못하다]’의 뜻을 취하여 백불암(百弗庵)을 호로 삼았다. 최흥원은 평생동안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을 실천하고 독서와 강론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유림의 종사(宗師)였다. 최흥원은 16세 이후 82세까지 섭렵한 서적 중 사서삼경을 제외한 책명을 들면 『태극도설(太極圖說)』[총 4회], 『통서(通書)』, 『서명(西銘)』, 『심경(心經)』[5회], 『성리대전(性理大全)』[3회], 『천명도(天命圖)』, 『이정전서(二程全書)』, 『근사록(近思錄)』, 『예의보유(禮儀補遺)』, 『학부통변(學蔀通辨)』, 『의례주소(儀禮註疏)』,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4회], 『가례(家禮)』[2회], 『소학』, 『이기설(理氣說)』, 『퇴계선생문집』, 『이학통록(理學通錄)』, 『반계수록(磻溪隧錄)』, 『주자연보(朱子年譜)』, 『주자대전』, 『대학혹문(大學或問)』, 『서명(西銘)』[3회], 『통서(通書)』,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이다. 이처럼 일평생 성리학 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강론하였는데, 『심경(心經)』, 『태극도설』, 『주자서절요』, 『성리대전(性理大全)』, 『서명(西銘)』 등에 관심을 보였다. 최흥원은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영조(英祖)가 경상감사에게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간행하도록 명하고, 도내 명유(名儒)에게 교정하게 하였는데, 1770년에 경상감사 이미(李瀰)가 당시 66세이던 최흥원에게 교정을 받아서 26권 13책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또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아래 북계정사(北溪精舍), 농연서당(聾淵書堂) 등에서 122명 제자를 배출했으며, 부인동에 「부인동동약」을 만들고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를 설치하여 빈곤을 벗어나게 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흥원은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당대에 저명한 성호 이익(李瀷), 번암 채제공(蔡濟恭), 경상감사 이성중(李成中)·이병모(李秉模)·정창순(鄭昌順), 이상정(李象靖), 박손경(朴孫慶), 조선적(曺善迪) 등과 교유를 하여 왕복 서찰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그는 이상정, 박손경과 함께 영남 삼로(三老)로 추앙받았다.
저서로 『백불암선생문집(百弗庵先生文集)』 8권 4책[목판본, 1815]과 호 가운데 암(庵)자를 다르게 표기한 『백불암선생문집(百弗菴先生文集)』 14권 7책[목판본] 등 2종과 『백불암선생언행록』 7권 3책[목판본]이 있다. 문집에는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주목되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여씨향약」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특히 퇴계 이황의 「예안향약[鄕立約條]」을 그대로 수용한 후 부인동의 실정에 맞게 보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선조의 묘제 등의 의례를 정한 「봉선입의(奉先立議)」, 선조 제당(祭堂)의 의절을 정한 「효제당절목(孝悌堂節目)」, 문중 자손들에게 학업을 장려하고자 정한 「학재절목(學齋節目)」 등이 있다.
[묘소]
최흥원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수북면 지계(枝界)에 있었는데 1996년에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검덕곡(儉德谷)으로 옮겼다.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묘지명(墓誌銘), 정종로(鄭宗魯)가 지은 묘갈명(墓碣銘), 박광석(朴光錫)이 지은 묘표(墓表)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최흥원은 1820년에 동천서원(東川書院)이 건립되자 제향되었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동천서원이 훼철되자 보본당(報本堂) 뒤에 가묘(家廟)를 세워서 지금까지 향사하고 있다.
[효자 정려]
최흥원이 지내던 옻골마을 앞에는 최흥원 효자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1789년에 조정의 명으로 세운 것인데, 내용을 보면 붉은 현판에 “효자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어모장군 세자익위사 익찬 최흥원지려[孝子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行禦侮將軍 世子翊衛司翊贊 崔興遠之閭]”라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