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289
한자 歷史[東區]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의 역사와 문화.

[선사시대]

1. 신석기시대

대구광역시 동구는 대체적으로 대구분지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세(地勢)를 이루고 있는 동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점은 현재 고고자료만으로는 특정(特定)하기가 곤란한 형편이다. 다만, 금호강 연안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 청동기시대

대구광역시 동구는 대구분지의 중앙부를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흘러 금호강과 합류하는 신천(新川)의 주변 일대, 서쪽의 진천천(辰泉川)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어있다. 즉 대구광역시 동구의 봉무동(鳳舞洞), 백안동(百安洞), 미곡동(米谷洞), 율암동(栗岩洞), 동내동(東內洞), 각산동(角山洞)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한다. 고인돌의 존재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밖에 집자리나 선돌[입석(立石)]을 비롯한 생활 흔적들도 발견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동천동 유적에서는 작물을 경작(耕作)한 실상을 보여주는 유구까지 확인되고 있다. 취락의 형성과 고인돌의 집단 조성은 계급의 분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러한 성격의 여러 집단이 정복전쟁 등에 의해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초기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읍락(邑落)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고대]

고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역사는 금호강변에 위치한 봉무토성(鳳舞土城), 동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의 특징과 성격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동구에는 5세기를 중심 연대로 하는 고총고분이 넓게 존재한다.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不老洞)봉무동을 비롯해서 도동(道洞), 용수동(龍水洞), 미대동(美垈洞), 지묘동(智妙洞), 둔산동(屯山洞), 동내동, 괴전동(槐田洞), 진인동(眞仁洞) 등에 고분이 있다. 특히 불로동봉무동은 대규모 고총고분이 밀집된 공간이며, 인근 다른 고분군보다도 크고 수가 많다. 이는 신라의 정치세력과 연관성이 없는 독립적인 권력층이 존재한 것으로 이해함이 바람직하다.

신라는 7세기 후반 수도 금성(金城)[지금 경상북도 경주시]을 벗어나 달구벌[지금 대구광역시]로 천도할 계획이었다. 달구벌이 천도 대상이 된 것은 달구벌, 팔공산이라는 지명과 연관이 있다. 이들 명칭이 모두 닭과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팔공산동화사(桐華寺), 갓바위, 부인사(符印寺)공산[중악]의 큰 사찰이 많다는 점은 동구가 정치적으로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10세기 초 고려와 후백제 간의 공산전투가 벌어지게 된 연유도 동구 지역이 지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동구가 고대사에서 등장하는 기록은 치성화현(雉省火縣)이다. 치성화현은 압량군[지금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에 소속되어 있는 현이었다. 경산일대에 있었던 소국 압량국(押梁郡)[압독국(押督國)]이 신라에 정복당하면서, 압량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505년(지증왕 6)에는 주(州)·군(郡)·현(縣)제가 시행되면서, 압량군에 치성화현, 마진량현, 노사화현 3영현을 두었다. 이때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쪽 일대를 치성화현(雉省火縣)으로 편제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영향으로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이 변화되었다. 이 때 압량군은 장산군(押督國)으로, 치성화현해안현(解顏縣)으로 바뀌었다. 해안현은 고려시대에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려]

고려시대 현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행정구역은 해안현(解顏縣), 안심소(安心所) 등이다. 후삼국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시기 동구의 팔공산은 중요한 역사 공간이었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은 927년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전투였다. 발단은 925년 조물성전투(曹物城戰鬪)였다. 당시 왕건은 신라의 지원 요청으로 조물성에서 견훤과 싸우던 중 전세가 불리해지자 견훤과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하였다. 그런데 견훤이 고려에 인질로 보낸 자신의 조카 진호(眞虎)가 다음 해 926년에 갑자기 숨지자, 견훤왕건이 살해한 것이라며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지금 충청남도 공주시]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후백제군의 기세가 워낙 날카로워 일단 싸움을 피했다가, 927년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신라 경애왕도 왕건의 요청에 응해 군사를 보내 후백제 공격에 합세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견훤은 신라 수도인 금성[지금 경상북도 경주시]으로 향했고, 이에 경애왕은 왕건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왕건은 직접 정예 기병 5천을 이끌고 금성 쪽으로 향했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시킨 뒤 공산으로 가서 왕건과 정면 대결하였다. 공산전투에서 견훤은 대승을 거두었다. 왕건은 가까스로 홀로 달아났다. 고려 개국의 일등 공신인 신숭겸(申崇謙)왕건의 갑옷을 대신 입고 후백제군을 유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929년까지 견훤은 승승장구했다. 930년 1월, 소백산맥 자락의 고창[지금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 간의 전투에서는 왕건이 대승을 이루었다.

[조선]

조선 초기에 대구는 조선의 지방행정단위에서 가장 낮은 현이었다. 1403년(태조 3) 3월에 수성현(壽城縣)과 해안현(解顔縣)을 대구에 영속시켰다. 1466년(세조 12) 진관제(鎭管制)가 확립됨에 따라 대구진을 두게 되면서 대구군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대구가 발전하는 중요 계기였다. 1592년(선조 25) 일어난 임진왜란은 여러 면에서 대구의 중요성을 눈에 띄게 한 사건이었다. 1601년(선조34)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또 한 번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군현 아래의 행정체계에는 면리제(面里制)를 운영하였다. 이에 종전 수성현, 해안현, 하빈현, 화원현(花園縣), 풍각현(豐角縣)이 면리제로 편성되었다. 오늘날의 동구를 기준으로 보면, 동상면(東上面)의 가암리(駕巖里), 신천리(新川里)와 수북면(守北面)의 금정리(琴汀里), 효목리(孝睦里)가 해당된다. 또한 해안현이 나뉘어 편성된 해서부면(解西部面), 해동촌면(解東村面), 해북촌면(解北村面), 해서촌면(解西村面)이 여기에 해당된다.

동구 지역은 농촌지역과 산간지대로 구분되었다. 동상면, 해동촌면, 해서부면이 농업지대였고, 하양·안심 일부 지역과 해북면과 해서촌면 등지는 산간지대였다.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시장이 발전하였다. 동쪽과 북쪽은 읍장(邑場)[2, 7일], 백안장(百安場)[3, 8일], 신장(新場)[4, 9일], 해안장[5, 10일]이 순환적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금호강(琴湖江)공산은 동구 지역의 각 동리들을 구획하는 한편 삶의 조건이었다. 공산은 조선시대 불교문화가 전승되는 곳이었다.

[근대]

근대 시기 동구는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존립하지 않았다. 해안현은 달성군에 속했고, 신암동은 수성면에 속했다. 이처럼 동구의 행정구역은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에 걸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변동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1938년 대구부 동부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이전 동구는 대구와 서울 등의 계몽운동, 산남의진의 의병전쟁에 참여하는 양상이었다. 또 러일전쟁 이후 경부선 철도 부설과 함께 일본인의 침탈이 심하였고, 특히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에 집중되었다.

1910년대에 동촌은 대구선 철도와 대구-경주가도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해 동구에서는 새배달모듬을 통해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운동팔공산 미대동 만세시위운동, 동화사 학림 학생들의 대구 남문밖시장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여 3.1운동이 전민족적 항일운동으로 고양되는데 기여하였다. 1920년대 동구에서는 식민지지주제에 기반한 산미증식계획이 추진되는 가운데 해안면에서는 해안면소작조합을 통해 지세 투쟁이 전개되었다. 또 신암청년회와 효목청년회가 달성군청년연맹의 조직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민족협동전선의 신간회 운동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세계대공황 이후 일본 자본주의의 위기를 한국에 전가시키고, 일제의 전쟁정책에 한국을 강제 동원하는 방식의 전시동원체제를 운영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사상을 통제하여 일제의 전쟁정책에 순응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통해 전시체제 강화를 위해 동원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동구에서 공려조합, 7군군사후원연맹, 국민훈련소, 경방단 등을 통해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을 실현해 나갔다. 또 동촌에 대구비행장을 건설하고, 동촌유원지를 조성하는 등 동촌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30년대 동구의 경우 대구와 경북에서 전개되었던 농민, 노동, 학생, 여성 등 민족운동과 일제의 전쟁정책에 반대하는 반제운동에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즈음 1940년 대구사범학교의 항일비밀결사 무우원(無憂園)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현대]

대구광역시 동구가 본격적으로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등장한 시기는 1963년 1월 1일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부터이다. 이후 동구는 경산군의 일부가 동구로 편입되면서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동구는 대구시 전체 면적 20.6%에 해당하는 182.18㎢의 넓은 면적을 가진 도농복합도시이다. 동구에는 동대구역, 동대구역복합환승센터, 대구국제공항이 있어 영남권 광역교통의 핵심도시이다. 또한 동구는 대구혁신도시, 첨단의료복합단지, 이시아폴리스 등 대형 국·시책 프로젝트 사업으로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성장을 견인하고 있는 신성장 동력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동구는 영산인 팔공산(八公山)과 오랫동안 대구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금호강변의 동촌유원지가 자리잡고 있어 뛰어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동화사·파계사·부인사·갓바위 등 한국 불교의 성지라 할 만큼 중요한 문화적 자산을 품고 있다. 그리고 불로고분군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역사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팔공산을 배경으로 격정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팔공산은 좌우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동구는 일제강점기부터 각광받던 동촌이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쉼의 공간이었는데, 1963년 2월에 대구시는 동촌유원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세부 예산과 세부 계획을 수립하였다. 1965년 동촌이 유원지로 지정되었고, 1982년부터 동촌유원지 개발을 추진하였다. 1990년에는 1996년까지 공사비 2백억 중 30억을 투입하여 유원지 기반시설을 다질 계획을 추진하였다. 또 대구시는 동촌유원지를 2002년 월드컵 대구경기에 대비해 국제적 휴식 공간으로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동촌의 대구비행장은 한국전쟁기 미군과 한국 공군의 주요 전략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1959년부터 민간공항으로 활용되었다. 1996년 대구공항에 국제선 정기노선 취항하면서 국제공항으로 발돋움하고, 영남권 공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향후 영남권신공항의 추진 여부에 따라 대구국제공항의 미래도 결정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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