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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04
한자 洪礪不祧廟
영어공식명칭 Hong Ryeo Bujomyo|Shrine for Hong Rye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상거리 208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홍려 부조묘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5년 4월 15일 - 홍려 부조묘 앞에 당성위공 묘비 건립
현 소재지 홍려 부조묘 -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상거리 208 지도보기
원소재재 홍려 부조묘 -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상거리 208
성격 사당
양식 한옥 맞배지붕
관련 인물 홍려(洪礪)
소유자 재당 남양 홍씨 화수회
관리자 재당 남양 홍씨 화수회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상거리에 있는 조선 전기 부마도위 홍려의 사당.

[개설]

홍려(洪礪)[?~1533]는 남양홍씨 토홍계로 시조 홍선행(洪先幸)의 13세손이다. 1525년 조선 시대 중종의 딸인 혜정 옹주와 혼인하여 종2품의 품계인 가의대부 당성위(唐城尉)에 봉해졌다. 홍려는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작서의 변[(灼鼠之變)]’에 연루되었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誣告)로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작서의 변은 1527년(중종 22) 쥐를 잡아 동궁(東宮)[뒤의 인종]을 저주한 사건으로, 중종의 빈이었던 경빈 박씨(敬嬪朴氏)의 소행으로 지목되어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福城君), 사위 홍려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김안로와 아들 김희(金禧)의 무고로 밝혀졌고, 홍려의 누명도 벗겨져 1532년(중종 27)에 신원(伸冤)받게 되었다.

[위치]

홍려 부조묘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상거리 208에 있다.

[변천]

홍려는 자손이 없었다. 그래서 외손인 파평 윤씨 집안에서 홍려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1884년(고종 21) 4월에 이르러서야 홍려의 동생 후손들이 부조묘(不祧廟)[조선 시대의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받은 신주를 모시는 사당]를 당진시 송산면 상거리로 옮겨 왔고, 제향(祭享)하게 되었다. 1985년 4월 15일에는 ‘당성위공 묘비(唐城尉公廟碑)’를 세웠다.

[형태]

홍려 부조묘는 약 66㎡[20평가량]의 대지에 건물을 세웠다. 안에는 정면 1간, 측면 1간의 맞배지붕 한옥을 두고 밖에는 콘크리트 벽돌로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는 흰색의 페인트를 칠했고, 울타리 위의 지붕은 황토색으로 칠했다. 대문은 겹처마 맞배지붕 한옥으로 설치하였다. 대문 위에는 ‘당성위 부조지위(唐城尉不祧之位)’라 새긴 목판을 걸었다.

[금석문]

홍려 부조묘 앞 좌측에 ‘당성위공 묘비’를 1985년 4월 15일에 세우고 홍려의 행적을 3면에 새겼다. 비석은 직사각형의 화강암 대석 위에 오석으로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세우고 화강암의 지붕돌을 올렸다. 전체 높이는 약 2m이다. 우측에는 ‘당성위공 묘비 건립 사적(唐城尉公廟碑建立事績)’을 세워 묘비 건립 과정과 비용을 협찬해 준 종중인들의 이름을 새겼다.

[현황]

홍려 부조묘는 야산을 뒤로 하고 정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하지만 주차장이 없고 ‘연방축길 292’ 집에서 밭두둑을 통해 이동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도로에서 가깝고 식별이 용이하며 접근성이 양호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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