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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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州安氏 |
영어공식명칭 | Gwangju Ansi|Gwangju A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00년 - 광주안씨 당진 입향조 안석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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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60년 - 광주안씨 당진 입향조 안석복 사망 |
본관 | 광주(廣州) - 경기도 광주 |
입향지 | 광주안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
세거|집성지 | 광주안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오곡리 |
묘소|세장지 | 광주안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
성씨 시조 | 안방걸(安邦傑) |
입향 시조 | 안석복(安錫福) |
[정의]
안방걸이 시조이고 안석복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는 광주안씨(廣州安氏) 사간공파(思簡公派)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는 안석복(安錫福)[1400~1460]이다. 안석복의 후손들은 송악읍의 대지주로서 학문에 종사하였고, 중앙 관료로 진출하여 명성을 드높였다. 특히 근·현대 당진 지역 대표 유지로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가문이었다.
[연원]
광주안씨의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 대의 인물로 대장군이 되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기에 광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광주안씨는 ‘팔시중(八侍中) 칠학사(七學士)’라 하여 8명의 문하시중을 냈고 7명의 학사를 배출하여 명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고려 시대의 세계(世系)를 살펴보면 시조인 안방걸 이후 18세까지의 인물 중 대부분 문하시중, 평장사 등의 관직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19세손인 안성(安省)에 이르면 조선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조선 시대의 광주안씨들은 고위 관직을 지냈다기보다는 청렴함이 강조되는 성향이 있다. 특히 안성은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안성의 시호는 사간공(思簡公)으로 이의 후손을 사간공파라고 한다. 또한 안성의 아들 중에 안철관(安鐵關)이 주부(主簿)를 지냈기에 안철관의 후손을 주부공파(主簿公派)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의 과거 급제자 명부인 『조선조 방목(문과)』을 보면 광주안씨 급제자는 모두 38명으로 나온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안방걸의 25세손인 안민학(安敏學)과 36세손인 안종화(安鍾和)를 들 수 있다.
[입향 경위]
광주안씨가 어떻게 당진에서 살게 되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단지 시조 안방걸의 21세손인 사간공파 안석복의 묘소가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부수리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안석복 대에 신평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3대에 걸쳐 신평에 묘소가 있었고 24세손인 안담(安曇)[1504~1564]부터 묘소가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면 고대리에 있다.
[현황]
광주안씨 24세손인 안담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안민도(安敏道)[1530~1590]로 승의랑 금화사 별제(承議郞禁火司別提)를 지내고 통정대부 공조 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로 추증되었다. 안민도의 묘소는 송악면 한진리 옥우물에 있다. 안민도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고 막내딸이 송취대(宋就大)에게 시집을 갔는데, 송취대는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아들이다.
둘째는 안민학(安敏學)[1542~1601]이다. 안민학은 당대의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사암(思菴) 박순(朴淳) 문하에서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 외에도 안민학은 이율곡(李栗谷)·성우계(成牛溪)·정송강(鄭松江)·백옥봉(白玉峰)·조중봉(趙重峰)·송구봉(宋龜峰)·이형은(李坰隱) 등과도 교유하였다. 안민학의 호는 풍애(楓厓) 또는 호월당(湖月堂)이라고 불렀다. ‘호월당’의 의미는 당진시 송악면 고대리에서 바라보는 한진 앞바다를 큰 호수로 여기고 그곳에 비친 달을 기린 것으로 보인다. 안민학의 묘소는 고대리 선영, 아버지 안담의 묘소 아래편에 있다. 안민학은 학문이나 문필, 효성 등으로 많이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부인에 대한 애도문으로 특히 유명하다. 안민학의 호를 딴 「풍애 애도문(楓崖 哀悼文)」은 1576년(선조 9년) 5월 초10일 안민학이 35세 되던 해에 부인 곽씨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입관 때 애도의 뜻을 적어 관 속에 넣었던 것이다. 「풍애 애도문」은 국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우선 조선 시대 참된 부부상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고, 당시의 표현 및 표기법, 음운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필로 자연스럽게 쓰였다는 점을 통하여 당시 선비들이 한글을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안씨 후손 중 안기원(安基遠)[1823~1896]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안기원의 자는 선호(善浩), 호는 방산(方山)인데,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서 글을 익혔고 운양 김윤식(金允植)과도 깊이 교류하였다. 저서로 『방산집(方山集)』이 있는데 이조 참의 김기수(金綺秀)가 서문을 썼다.
안기원에게는 2남 2녀의 자식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안종선(安鍾善)[1850~1913]이다. 1892년에 음직으로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냈고 1904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학파(鶴坡)인데 저서로 『학파집(鶴坡集)』이 있다. 둘째 아들은 안종화(安鍾和)[1860~1924]이다. 안종화는 교육 운동을 전개한 애국 계몽 운동가였다. 특히 1906년 5월, 민영휘(閔泳徽)가 휘문 의숙(徽文義塾)을 열 때 참여하여 교육을 담당하다가 1908년 2월부터 1908년 9월까지 4대 숙장(塾長)[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08년 1월 지석영·정교 등과 함께 기호 흥학회를 조직하여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안종화의 저서로는 『동사절요(東史節要)』,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등이 대표적이다.
안종화의 아들인 안덕수(安德洙)[1895~1963]는 한학을 하면서도 의술을 익혀 무의촌이나 가난한 가정에 의술로 자선 사업을 하였다. 또한 오곡리의 대지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기증하여 송악 공립 보통학교[현 송악 초등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그 외 광주안씨 인물은 안만수(安晩洙)[1879~1949]가 있다. 안만수는 한말에 경성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였는데 송악읍 월곡리 출신의 대법관 김찬영(金讚泳)과 동문이다. 안영수(安暎洙)[1885~1932]는 대한 제국 당시에 육군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시위 기병대 참위(參尉)를 지냈다. 또한 안병석(安秉奭)은 운동선수로 활약하여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19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에 한국 대표 농구 선수로 참가하였다. 1957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국전 서예부에 입선하는 등 화가로도 활동하였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의 광주안씨는 안담 이후 안민학을 거치면서 송악면 고대리·부곡리·오곡리에서 근 4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거지를 이루며 살아왔다. 신평면 부수리까지 합한다면 당진에 세거지를 이룬 기간은 500여 년이 훨씬 넘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 유적]
광주안씨의 선영(先塋)은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면 고대리에 있다. 안담 이후 10여 기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으며 안민학의 신도비는 선산의 아래편에 있다. 사당은 송풍재(松楓齋)이다. 송애(松崖) 안담과 둘째 아들인 풍애(楓崖) 안민학의 호에서 한 글자씩 인용하여 ‘송풍재’라 하였다. 하지만 송풍재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선산 옆에 있다가 큰 도로가 개설되면서 헐리고 말았다. 현재 광주안씨는 대다수가 송악읍을 떠났다. 다만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의 선영과 오곡리의 안종화 고택[현 송규섭 가옥(宋圭燮家屋)]이 있어서 예전의 유구한 전통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