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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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敏學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An Minha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학로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42년 - 안민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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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01년 - 안민학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922년 9월 - 안민학 신도비 건립함 |
현 소재지 | 안민학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2리 산33-1 |
원소재지 | 안민학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2리 산33-1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안민학(安敏學) |
재질 | 화강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농대석 가로]106㎝[농대석 가로]|63㎝[농대석 세로]|15㎝[농대석 높이]|61㎝[비신 가로]|27㎝[비신 세로]|159㎝[비신 높이]|107㎝[지붕돌 가로]|73㎝[지붕돌 세로]|63㎝[지붕돌 높이]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안민학의 신도비.
[개설]
안민학(安敏學)[1452~1601]의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이습(而習), 호는 풍애(楓厓)이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당대의 대유학자들인 이이, 정철, 이지함, 성혼, 고경명 등과 교유하였다. 사헌부 감찰, 대흥 현감을 시작으로 아산·현풍·태인 등의 현감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사가 되어 군량의 수송을 맡았다. 이후 사도시 첨정이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질병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자 군량과 병력을 유성룡에게 돌리게 한 후 홍주에서 살다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나라에서는 자헌대부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겸 이조 참의로 추증하였고,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민학의 묘소와 신도비는 송악면 고대리 광주 안씨 선영에 세워져 있다.
[건립 경위]
안민학 신도비는 1922년 9월 광주 안씨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이는 안민학의 11세손이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국학자 안종화였다. 글씨는 집당 구양순체로 새겨졌고,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은 12세손 안덕수가 썼다.
[위치]
안민학 신도비는 당진시 송악읍 고대 2리 산33-1 광주 안씨 묘역에 있다.
[형태]
안민학 신도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화강석 농대석에 오석으로 비신을 세우고, 화강석의 지붕돌을 올려 기품을 더했다. 농대석의 크기는 가로 106㎝, 세로 63㎝, 높이 15㎝이고, 비신은 가로 61㎝, 세로 27㎝, 높이 159㎝이다. 지붕돌은 가로 107㎝, 세로 73㎝, 높이 63㎝이다.
[금석문]
비명(碑銘)은 '자헌대부 규장각 제학 시 문정 안공 신도비명(資憲大夫奎章閣提學諡文靖公安公神道碑銘)'이다.
[의의와 평가]
안민학 신도비는 당진의 세거 성씨인 광주 안씨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유물이다. 특히 건립 연대가 1922년이라는 것은 한말의 국학자로 유명한 안종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안민학의 신도비를 통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던 안종화의 문장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민학 신도비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