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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253
한자 喪禮
영어공식명칭 Funeral Rites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순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당진시 - 충청남도 당진시
성격 평생 의례

[정의]

충청남도 당진에서 상중(喪中)에 행해지던 모든 의례.

[개설]

상례란 임종에서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친 후 묘제까지의 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충청남도 당진에서는 운명하는 순간부터 염, 성복, 발인, 치장, 우제, 그리고 담제와 길제까지 정성을 다해 망자를 모셨다. 유교적 윤리관에 입각해서 부모와 조상을 받든다는 관념이 강했기에 몸은 비록 떠나더라도 정신은 가족 곁에 있어서 보살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지배 체제가 되면서 충청남도 당진에서도 유교식 상례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개화기에 이르러 내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와 기독교를 수용하기 시작하고 1969년 가정의례 준칙의 제정 등으로 상례가 간소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2003년에 당진 장례식장이 생겨나면서 장의사의 주도로 상례 풍습이 진행되고 있다.

[절차]

유교식 상례는 초종, 습, 소렴, 대렴, 성복, 천구, 발인, 치장, 우제, 졸곡, 부제, 소상, 대상, 담제, 길제 순서를 거친다.

충청남도 당진의 전통적인 상례는 통곡하며 시신을 거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운명에서 습 단계 전까지를 초종(初終)이라 한다. 대개 머리를 동으로 향하여 북쪽 창 아래에 바르게 눕힌 후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입힌 후 모든 자손에게 임종을 알린다. 시체가 굳기 전에 팔다리를 주물러 펴고 두 손의 엄지가락과 두 발의 엄지가락을 묶어 수족을 묶는 끈을 잡아 맨다. 망인을 저승까지 인도하는 사자가 있다고 생각하여 사자밥을 해서 대문 밖에 차려 놓는다.

다음은 '초혼(招魂)'이나 '고복(皐復)'의 단계이다. 운명 후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오르거나 마당에 서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은 채 북쪽 하늘을 향하여 휘두르며 망인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이 복을 부른 옷은 입관할 때 관 속에 넣기도 한다. 그 뒤, '발상(發喪')이라 하여 초상이 났음을 외부에 알린다. 상주를 세우고 짚자리와 짚베개에 의지하여 호곡한다. 상주는 "애고, 애고!" 하고 조객들은 "어희, 어희!' 한다. 가족들은 머리를 풀고 옷을 갈아입는다. 장례는 호상(護喪)이 관리한다. 호상은 친지나 지명 인사에게 부고 발송, 조객록, 부의록 작성, 금전 출납 등 상례 일체를 주관한다. 망인에게는 '전'이라 하여 술, 과, 건포, 감주를 하루 한 번씩 올린다.

다음 단계는 습(襲)과 염(殮)이다. 운명한 다음 날 향나무 쑥 삶은 물을 향탕수라 하여 세 그릇을 준비한다. 한 그릇은 머리, 한 그릇은 윗몸, 나머지는 아랫몸을 씻긴다. 남자는 상투를 짜고 여자는 쪽 지어 버드나무 비녀를 꽂고 검은 비단으로 댕기를 감기며 명주나 비단으로 주머니 다섯 개를 만들어 빗질할 때 빠진 낙발을 주머니 하나에 넣고 손톱, 발톱을 깎아 네 개의 주머니에 넣어 대렴 때에 원위치에 놓는다. 명건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쌀을 잘 씻어 버드나무로 깎은 숟가락으로 쌀을 세 번 입에 떠 넣어 이승의 마지막 음식을 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슬[대개 금, 옥, 진주, 돈 등]을 넣는다. 이것을 반함이라 한다. 반함이 끝난 다음 시신에게 수의를 입힌다. 이것을 소렴(小殮)이라 한다. 소렴 상에 속포와 장포, 지금을 펴고 시체를 옮긴 후 수의를 입히는데, 대개 여자 시신은 여자가, 남자 시신은 남자가 한다. 그다음 밑에 깔았던 지금으로 시신을 싼 다음 장포 등으로 21매를 묶는다. 소렴을 한 다음 날 시신을 대렴포로 싸고 묶어서 관에 모시는 것을 대렴(大殮)이라 한다.

대렴이 끝나면 상주와 가족들은 복제에 따라 상복을 입고 영좌 앞에는 주, 과, 포를 진설한다. 이러한 과정을 성복(成服)이라 한다. 이때 축문은 없이 단작으로 제사를 올리고 남녀 복인은 복의 순서대로 구분하여 남자는 서향을 하고 여자는 동향을 하여 서서 상호 곡을 한다. 상주는 이때부터 짚자리에 앉아 곡을 하는데 세상에 나왔을 때 짚자리 위에서 낳았다 하여 그렇게 하는 풍습이 있다. 성복에 상주는 마포로 지은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두건(頭巾) 위에 굴건(屈巾)을 쓰고 수질(首絰)을 매고 허리에는 요질(腰絰)을 매며, 행전(行纏)을 치고, 짚신을 신고, 대나무 상장(喪杖)을 짚는다. 미성년 상주는 두건 대신 마포로 머리를 싸매고 수질을 쓰며, 여상주는 상복을 입고, 수질과 요질을 매고, 상장을 짚는다. 그리고 복인은 상복에 두건을 쓴다. 또한 복을 입지 않아도 3년 동안 마음으로 슬퍼한다는 것을 '심상 삼 년'이라 하여 스승이 작고했을 때에도 이렇게 3년까지 슬퍼했다. 성복 후에는 조문을 받는다.

다음은 천구와 발인(發靷)이다. 천구란 빈소를 열고 영구를 상여로 운구하는 것을 말한다. 천구에 앞서 대개 사당이 있으면 혼백을 사당으로 모시고 가서 전을 올리고 다시 영좌에 돌아와 장차 천구할 것을 고유하고 상여로 운구한다. 혼백을 영거 앞에 모시고 주과포혜를 진설하고 견전(遣奠)을 올린다. 상주가 술을 올린 다음 축관이 견전축을 읽어 고한다. 발인 행렬은 방상[탈을 쓰고 창과 방패를 가진 사람], 명정, 영거, 8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 먼 친척, 일반 조객의 순서로 장지로 간다. 장지가 결정되면 토지신에게 사토제를 지내고 관을 모실 곽을 만든다. 하관 후에 명정으로 관을 덮는다. 상주는 검은 비단과 빨간 비단으로 폐백을 드리고 곡을 하며 재배한다. 폐백이 끝나면 관 위에 횡판을 덮고 회다짐을 하고, 흙을 채워 묻으면서 상여꾼들이 회다지 노래를 부르며 묘를 만든다. 그리고 토지신에게 제를 지내고 혼백을 표전에 모시고 평토제를 지낸다. 그다음 상주는 혼백을 모시고 상여가 오던 길로 돌아가면서 곡을 한다. 이를 반혼이라 한다. 반혼을 하면 집에 있던 복인은 곡을 하며 맞이한다. 그리고 혼백을 모신 후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며 우제를 지낸다. 우제는 장례를 지낸 날 모시는 초우제와 초우가 지난 유일(柔日)[乙, 丁, 己, 辛, 癸에 해당하는 날] 아침에 드리는 제사이다. 삼우제는 재우를 지낸 후 강일(剛日)[甲, 丙, 戊, 庚, 壬에 해당하는 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삼우가 끝난 3개월이 지나서 강일을 당하면 졸곡(卒哭)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고 이때부터 상주는 밥도 먹고 잠잘 때에 목침을 벤다. 그리고 다음 날 제사를 지내며 새 신주를 조상 신주 곁에 모시는 부제(祔祭)를 지낸다. 초상을 치른 지 만 1년이 되는 날 소상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남자는 수질을 벗고 주부는 요질을 벗는다. 초상 후 만 2년이 되는 날은 대상이라 하여 비로소 상복을 벗고 음식 중 젓갈 같은 것을 먹을 수 있다. 이 밖에도 대상 후 한 달이 지나서 두 달에 접어드는 날을 가려서 담제를 지내고 담제를 지낸 지 이튿날 날짜를 가려서 길제를 지낸다. 길제를 지낸 후에는 모든 상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사당의 5대조 고비는 제사를 모시고 묘사(墓祀)에 옮긴다. 사당에는 4대조 이하 신위만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당진에서는 제례상례만큼은 어느 풍속보다 중요하게 여겼기에 절차 또한 복잡했고,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여 상례 절차를 도왔다. 하지만 현재는 상례가 거의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간소화되고 있고 마을 사람들보다는 지인들이 참석하여 애도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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