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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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䄵洙 |
이칭/별칭 | 판흥(判興),수당(秀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살았던 기업가.
[가계]
김연수(金䄵洙)의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전라북도 고부군에서 아버지 김경중(金暻中)과 어머니 장흥 고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연수가 어릴 때 이미 전라도를 대표하는 거부(巨富)로 성장한 대지주였다. 형인 김성수(金性洙)는 1891년에 출생해 동아 일보사와 경성 방직을 설립하였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김연수는 15세에 박씨 부인과 혼인해, 슬하에 삼양 염업 회장을 지낸 김상준(金相駿)과 고려 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상협(金相浹) 등 6남 7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연수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해 고향에서 영신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아사부[麻布] 중학교와 교토 제3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21년 교토 제국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하여 전라남도 장성에서 농장 경영에 착수하여, 일대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1931년 삼수사를 삼양사(三養社)라고 개칭하였고, 1935년에는 형 김성수가 설립한 경성 방직의 제2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연수는 삼양사를 모기업으로 해서 염업, 제당업, 제빙업, 방적업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한편 김연수는 기업가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교육 활동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1929년에는 중앙 학교 설립에도 관여했고, 보성 전문학교 재건에도 영향을 미쳐 지금의 고려 대학교와 중앙 고등학교로 발전시켰다. 김연수는 장학 활동도 활발히 벌여 1939년에는 재단 법인 양영회(養英會)에서 이사장을 지냈고, 1968년에는 수당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김연수는 기업가이자 교육가로서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 그의 친일 행적들이 밝혀져 많은 비판도 받고 있다. 김연수는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들에게 학병(學兵)을 권유하고 국방헌금을 납부하는 등 조선 총독부와 가까이 지내면서, 경성 방직을 기반으로 군수 산업에 뛰어들어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1944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 항공 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한편 김연수는 1939년에는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에는 중추원 참의원, 조선 임전 보국단 간부 등도 역임하였다. 1935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 공로자 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경성 방직 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수록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1961년 전국 경제인 연합회의 전신인 경제 협의회 회장을 맡아 재계의 원로로 활동하였다. 2009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4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2010년 김연수의 유족들이 김연수를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한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를 상대로 낸 청구 소송은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김연수는 1979년 12월 4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소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자택 뒤편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1년 금탑 산업 훈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