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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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鷺梁津 |
영어공식명칭 | Nodeulnaru |
이칭/별칭 | 노량진,노량나루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창우 |
소재지 | 노들나루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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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나루터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을 지나는 한강에 있던 나루터.
[개설]
노들나루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에 있었는데, 서울로 통하는 한강의 나루터 중에서도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군대가 유진(留陣)하는 진(鎭)이 설치되었던 나루이다.
‘노들’의 의미는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동작구 본동 일대이다. 여기에 있던 나루터를 ‘노들나루’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어로 바꾼 것이 노량진(鷺梁津)이다. 노들나루 주변에는 도진촌락(渡津村落)이 형성되었다.
[변천]
노들나루는 개인 소유의 나룻배 10척이 도선료를 받고 행인을 건네주었는데, 조선 초기에 이르러 관(官)에서 이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1414년(태종 14) 광진(廣津)과 더불어 노들나루의 관리자로 별감(別監)을 처음으로 파견하고, 관선(官船) 15척을 비치하여 진에 소속된 진부(津夫)들로 하여금 선가(船價)를 받지 않고 건너게 하였다.
관에서 나루를 관리하게 된 것은 행인들의 편리한 도강(渡江)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이 길목을 지켜 수상한 사람을 검문하고자 한 데도 목적이 있었다. 노들나루는 조선 초기에는 주로 민간인들이 왕래하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국왕의 행차가 빈번하였다.
조선 초기에 세종과 세조는 온양온천으로 휴양하러 행차 시 이용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숙종의 영릉 행차와 강남에 위치한 태종, 세종, 중종, 효종의 국장에도 이용되었다. 특히, 정조(正祖)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수원에 마련하고 능행(陵行)에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다.
이 때문에 노들나루에도 한강나루·삼전도에서와 같이 배다리[舟橋]가 놓이게 되었고, 정조는 이를 위하여 주교사(舟橋司)라는 전담 관청을 설치하였다. 연산군 때는 이곳의 나루만을 통행하도록 하고 나머지 한강의 모든 나루를 봉쇄하기도 하였다.
1899년 경인선 및 1900년 한강철교 건설과 인도교가 준공되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지금은 큰 다리가 놓이고 노들나루가 있던 곳에는 노들나루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현황]
1989년 세운 ‘노량진 나루터’ 표석은 예전 교통의 요지였던 노들나루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표석은 노들나루공원 내 남부수도사업소 건물 옆에 있는데, 지하철 9호선 노들역 2번 출구에서 찾아갈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노들나루는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하여 충청도·전라도로 향하는 중요한 통행로였다. 현재 노들나루는 한강철교 및 한강대교가 건설되어 나루의 기능은 쇠퇴하였지만 한강에 있었던 여러 나루들과 함께 조선 시대 사람들의 이동 및 물자 수송에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