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58
이칭/별칭 주교,주량,부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차인배

[정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한강 변에 배를 연결하여 만든 교량.

[개설]

배다리는 부교(浮橋) 중 하나로 선박 수 척 혹은 수십 척을 연달아 양측 강안을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 등을 덮어 통행이 가능하게 한 임시 교량으로 주교(舟橋) 또는 주량(舟梁)이라 칭하였다.

근대 이전까지 강은 인원과 물류의 이동 통로이자 단절의 공간으로서 인식되었다. 때문에 일찍부터 강변에는 도하를 위한 나루가 설치되어 선박을 이용한 교통을 가능토록 하였다.

조선왕조에서도 주요 지점에 도(渡), 진(津), 제(濟), 섭(涉) 등을 설치하고 국가에서 관리와 운영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왕의 행차를 비롯하여 수 백 명의 행렬이 한꺼번에 도강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자 다리를 가설하는 방안이 강구되었다. 1045년(고려 정종 11)부터 임진강에 부교(浮橋)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1417년(태종 17) 마전포(麻田浦)[현재 송파 인근]에 주량(舟梁)[배다리]을 설치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이어, 세종세조가 온양의 온천에 휴양을 떠날 때나 성종, 중종 때 영릉(英陵), 선릉(宣陵) 등 한강 남안 능행시에도 여러 차례 배다리를 설치했다. 또한 정유재란 당시 명(明)의 원병이 동작진(銅雀津)에 주둔하였는데, 선조는 10차례 이상 이곳에 거둥하였고 이때 ‘동작부교(銅雀浮橋)’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전쟁기간 동안 동작진배다리가 가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 가장 빈번하게 배다리를 가설했던 정조(正祖)는 1789년(정조 13)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묘소를 화성(華城)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하였는데, 이후 1800년까지 13차례나 능원행차를 할때마다 부교를 이용했다.

특히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진행한 원행은 전무후무한 대규모 능행 행사였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로 기록되었다. 정조배다리를 설치하는 주교사(舟橋司)라는 전담 관청을 별도로 설치하고 제반 기준인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의 재위기간 중 헌릉(獻陵), 영릉(英陵), 영릉(寧陵)의 능행 시에는 광진(廣津, 楊津)[광나루]이나 삼전도(三田渡)에 주교를 설치했지만, 대부분의 배다리노량진(鷺梁津)에 설치되었다. 이 길을 따라 온양온천 휴양, 선릉(宣陵)·정릉(靖陵)·화성(華城) 현륭원 능행이 진행되었다. 정조는 1790년(정조 14) 7월 배다리 설치에 관한 내용을 직접 생각하여 『주교지남(舟橋指南)』이라는 책으로 엮었는데, 주교의 설치, 운영상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효율적이고 과학적으로 이용하는 방법 등을 밝혔다. 이 책에서 정조한강에서 배다리를 설치할 최적지를 노량으로 밝히고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10-30번지 노량진 언덕에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의 본채 건물이 남아있는데, 이곳은 정조배다리를 건너 잠시 쉬기위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궁궐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넌 뒤 이곳에서 점심[晝食]을 해결하였기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라고도 칭하였다. 노량진 배다리와 주정소의 모습은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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