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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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至德祠 |
영어공식명칭 | Graveryard for Prince Yangyeong Yi Je |
이칭/별칭 | 양녕대군 이제 사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용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75년 - 지덕사 개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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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72년 8월 30일 - 지덕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지정 |
현 소재지 | 지덕사 - 서울특별시 동작구 양녕로 167[상도동 221-8] |
원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도동 옛 남묘 건너편 |
성격 | 사당 |
양식 | 건물 3동|분묘 1기|석물 7기|토지 1,739㎡ |
정면 칸수 | 사당 3칸|제기고 및 서고 2칸 |
측면 칸수 | 사당 2칸|제기고 및 서고 1칸 |
소유자 | 재단법인 지덕사 |
관리자 | 재단법인 지덕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사당.
[개설]
‘지덕(至德)’이란 이름은 『논어』 권8 태백편(太白篇)의 “태백은 지덕이다[太白, 其可謂至德也]”라고 한 공자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주나라 태왕 때 일로 태왕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태왕은 셋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천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를 알고 있던 장자 태백(太白)과 차자 중옹(仲雍)이 형만(荊蠻)의 땅으로 몰래 몸을 숨겨 계력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한 고사이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동생 충녕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방탕과 탁불(托佛)했다는 일화와 비교해서 양녕대군의 행동을 태백의 지덕으로 명명한 것이다.
[위치]
지덕사(至德祠)는 1675년(숙종 1) 양녕대군의 외손인 우의정 허목(許穆)[1595~1682]의 건의로 남대문 밖 서부 도저동에 세웠다. 이때 건립된 지덕사는 남관왕묘 건너편[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일대, 옛 도동1가 9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음해 건물이 완성되어 ‘지덕사’라 이름하고 사적을 지어 현판을 써서 걸었다. 이후 1912년 1월 일제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의 위치로 이전하여 2020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변천]
양녕대군은 유언으로 호화로운 예장(禮葬)을 하지 말고 묘비와 상석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7대손 이만(李曼)과 8대손 이성항(李性恒)이 묘소 앞에 석물을 세웠다. 그런데 그때 세운 묘비가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난데없이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졌다고 한다. 2020년 현재의 묘비는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형태]
지덕사는 토지 1,739㎡의 면적에 건물 3동, 분묘 1기, 석물 7기가 위치해 있다. 지덕사의 앞툇마루가 놓인 3칸의 사당을 중심으로 마당 좌우측에 제사당 서고 및 제기고를 두었다. 사당 뒤에는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합장한 묘가 자리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다.
[현황]
사당 내에는 세조 어제(御製) 금자현액(金字戀額)과 조선 후기의 문신인 허목의 휘호로 된 「지덕사기(至德祠記)」, 「정조어제 지덕사기(正祖御製 至德祠記)」, 양녕대군 친필로 쓴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月武)·팔곡병풍(八曲昇風)·목각판(木刻板) 및 양녕대군의 필적인 ‘숭례문(崇禮門)’ 탑본(搨本) 등이 보관되어 있다.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지덕사는 서울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묘역 중 석물과 함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사당 건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