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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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讓寧大君 李禔 墓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엄기석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394년 - 양녕대군 이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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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462년 - 양녕대군 이제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462년 - 양녕대군 이제 묘역 조성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75년 - 양녕대군 이제 사당 건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12년 - 양녕대군 이제 사당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2년 8월 30일 - 양녕대군 이제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 |
현 소재지 | 양녕대군 이제 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양녕로 167[상도동 221-8] 지덕사 |
성격 | 묘역 |
관련 인물 | 이제[양녕대군] |
관리자 | 재단법인 지덕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조선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이제의 묘소.
[개설]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묘역(墓域)은 조선 3대 국왕인 태종의 장남이자 4대 국왕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 이제의 묘소와 사당으로 구성된 묘역이다.
양녕대군의 이름은 이제(李禔), 자는 후백(厚伯)이다. 조선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사냥을 나가는 등 왕세자로 가져야 하는 격식 등을 갖추지 못하면서 자질을 의심받았다. 결국 1418년(태종 18) 왕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왕세자 자리는 동생인 충녕대군이 이어받은 후 왕위에 즉위하여 세종이 된다.
양녕대군은 왕자 신분으로 돌아간 뒤 경기도 광주의 사저로 거처를 옮겨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평생 동생인 세종과 매우 우애 깊게 지냈고, 과거 왕세자였다는 이유로 수십 차례 탄핵되었으나 세종의 배려로 처벌은 면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 후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의 편에 서는 정치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1462년(세조 8)에 69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나라의 예장을 받지 않고 묘비도 세우지 않겠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시호는 강정(剛靖)으로 굳세고 과감하며, 너그러우면서도 편안히 살다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다.
[위치]
현재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양녕로 167[상도동 221-8] 지덕사 사당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악산 지맥인 국사봉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양녕대군 사후 장지는 당시의 경기도 금천군으로 정해져 묘역이 조성된 후 안장되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이다. 양녕대군은 유언을 통해 석물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으나 7대손 이만(李曼)과 8대손 이성항(金性恒)이 석물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양녕대군의 사당은 1675년(숙종 1) 당시 우의정이었던 허목(許穆)[1595~1682]의 건의로 한양도성 남대문 밖 서부에 세워졌다. 이름을 ‘지덕사(至德祠)’라고 하였는데, 『논어』 권8, 「태백편(太白篇)」의 “태백은 지덕이다[太白, 其可謂至德也]”라는 구절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지덕사의 명칭과 관련된 이 고사의 내용은 주나라 문왕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자 태백(太白)과 차자 중옹(仲雍)이 셋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하여 몸을 숨긴다는 내용이다.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물러나 동생 충녕대군이 왕위를 이은 사실과 통하는 내용의 고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757년(영조 33) 양녕대군의 후손 이지광(李趾光)으로 하여 사당을 보수하게 하였고, 영조(英祖)가 직접 지은 제문(祭文)과 제사에 필요한 제물(祭物)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정조가 사액(賜額)하였고, 직접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를 하사하였다.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는 1912년 양녕대군 이제 묘역으로 이건되었다.
[형태]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사당인 지덕사를 포함한 건물 3채와 묘로 구성되어 있다. 지덕사는 제사당·서고·제기고 등 3칸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 뒤편에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소 앞에는 석물인 장명등과 묘비, 문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현재 사당 안에는 세조가 쓴 ‘금자현액(金字懸額)’과 허목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 정조가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 양녕대군의 글씨라 전해지는 ‘숭례문(崇禮門) 탑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주요 인물인 양녕대군 이제의 일대기를 확인하고, 장시간에 걸친 왕실의 핵심 인물에 대한 제사를 받드는 봉사(奉祀) 양상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