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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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청담도선장(淸潭渡船場),청담나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소현수 |
제정 시기/일시 | 조선 시대 - 청숫골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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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970년 - 청숫골나루터 영동대교 건설로 나루 기능 상실 |
비정 지역 | 청숫골나루터 -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한강변 |
성격 | 나루 |
관련 문헌 | 『강남구지』|『강남의 향토문화 기행』|『강남구 향토지』|『경향신문』[1964. 3. 26/ 1970. 1. 22] |
[정의]
조선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성동구 자양동의 뚝섬나루와 연결되었던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淸潭洞) 소재의 나루터.
[개설]
16세기 중반 이후 한강의 동호(東湖) 인근에 있던 독서당(讀書堂)을 근간으로 했던 시인 묵객(墨客)들이 봉은사(奉恩寺)로 탐승(探勝)하였고, 도성의 부녀자들은 불공을 드리기 위해 봉은사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뚝섬나루와 청숫골나루를 오가는 나룻배가 두 곳을 연결해주었다. 1960년대까지도 뚝섬유원지와 봉은사는 서울시민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청숫골나루는 영동대교가 건설되면서 사라졌다.
[명칭 유래]
과거 청담동 105 일대에 맑은 못이 있었으며, 현재 두산아파트가 위치한 청담동 134 일대, 한강변 물이 맑아서 청숫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겼는데, 청숫골나루는 여기서 유래된 나루의 명칭이다. 1914년 청숫골·숫골·큰말·작은말·솔모퉁이 등의 자연촌락이 청담리로 통합된 이후 청숫골나루는 청담나루 일명 청담도선장(淸潭渡船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 청담동 일대에서 잡힌 물고기는 청숫골나루를 통해서 강북으로 수송되어 도성 안으로 공급되었으며 게와 붕어는 조정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청숫골나루에 관선(官船)은 배치되지 않았고 사선(私船)이 수척 있어서 뱃삯을 받고 사람들을 건네주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뚝섬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 청담동·봉은사·삼성동으로 가는 것이 강남으로 통하는 대표적인 길이었다.
1964년 신문 기사에 의하면, 뚝섬과 청숫골나루 사이를 하루 평균 5백 명의 시민들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폭 5m, 길이 12m의 뗏목처럼 생긴 목선(木船)이 사람과 함께 가축과 자동차까지 실어 날랐으며, 청담·삼성·대치 마을에서 재배된 채소의 운반을 도맡았다고 했다. 즉, 강남의 채소를 싣고 뚝섬으로 나와 동대문-뚝섬 간을 다녔던 궤도차로 동대문시장에 가서 채소를 파는 아낙네들이 많이 이용했던 것이다. 도선료는 4원이며 도강(渡江)하는데 10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당시 1969년 말 개통된 한남대교를 통과하는 시내버스 노선이 없어서 주변 시민들은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강을 걸어서 건너고, 봄이 되면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나룻배를 타야했다고 한다. 1970년 영동대교가 가설됨으로써 청숫골나루 기능이 상실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영동대교 남단에는 청숫골나루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이후 영동개발 이전까지 한강을 따라 강원도로 오고 가는 배가 쉬었다 가는 나루터로 청숫골 사람들의 고기잡이배를 띄우는 선착장 역할도 하였던 곳이며, 농산물을 강북으로 수송할 때도 이용하였던 곳임’
[관련 기록]
청숫골나루터와 관련된 내용은 향토지 성격을 가지는 『강남구지』·『강남의 향토문화 기행』·『강남구 향토지』 등과 신문 자료 및 표지석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