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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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十二鄕賢 |
영어의미역 | Twelve Sages of Gangne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흥술 |
[정의]
강릉 12향현,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를 일컫는다. 이들은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개설]
-강릉을 빛낸 열두 명의 선비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100분의 선조들을 생각한다. 그 인물들이 노래에 나오는 대로의 훌륭한 생애를 살아갈 때 자신의 삶이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한국을 빛내는’ 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이 살아가면서 내려야 했던 매일 매일의 결정과 선택의 과정에서 ‘나라를 빛내기 위한’ 목적은 얼마만큼 작용했을까?
강릉 향현사에 가면,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번지]에 있는 향현사(鄕賢祠)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사당이다. 창건 당시의 건물은 1867년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중건하려 하였으나 1868년 비사액서원(非賜額書院)의 철폐령으로 중건 시도가 중단되었다. 1921년 향현의 후손들에 의해 강릉향교 서쪽에 중건되었으며, 1995년 황영조기념체육관 건립으로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이곳은 강릉이 낳은 수많은 인물 가운데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인물들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향(祭享)을 올리는 곳으로, 열두 명의 선현을 모시고 있다. 각각 학문으로, 덕성으로 당대를 빛냈던 분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만약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삶을 살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그 이름이 빛났을까. 그런 목적도 의도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학문과 인품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살았기에, 세월이 훌쩍 흐른 어느 날 향현사를 찾는 오늘의 객들에게 말없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향현사를 찾아 강릉을 빛낸 열두 명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위인으로 위패에 남아 있는 그들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그 인물들의 삶을 더듬어보고자 함이다.
[배경]
향현사의 12현은 처음부터 모두 이곳에서 배향된 것은 아니다. 1645년(인조 23) 당시 부사이던 강백년(姜栢年)과 전직 관리 이상혐(李尙馦)[牧使], 김충민(金忠愍)[直長] 등이 주장하여 사당을 신축했는데 그때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 사휴(四休) 박공달(朴公達),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도경(蹈景) 최운우(崔雲遇)의 6현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졌다.
그 뒤 1802년(순조 2) 춘헌(春軒) 최수(崔洙)가, 1808년(순조 8)에는 눌재(訥齋) 이성무(李成茂), 괴당(槐堂) 김윤신(金潤身), 농헌(聾軒) 박억추(朴億秋),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이 추가로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배향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생존연대가 1390년에서 1605년 사이로, 조선 초기 결성된 입신출사를 위한 강릉 지방 유생들의 결사체 ‘금란반월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최응현은 금란반월회의 스승이고, 최수와 김윤신은 계원이었으며, 최치운과 최수성은 최응현의 직계 존비속이다. 김열과 김담은 금란반월회 회원 김지(金遲)의 손자이며, 최운우는 회원 최자점(崔自霑)의 증손이 된다. 박공달은 회원 박시문(朴始文)의 조카이고, 박수량과 박억추는 박시문의 재종손·재증손이 된다.
여말선초 이래로 지방의 중소지주층은 꾸준히 확대되어왔다. 규모와 역량이 커진 이들 계층에게는 상호간의 유대관계가 필요했고,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금란계다. 16세기 이후 학연을 매개체로 한 인간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이로 미뤄보면 금란반월회는 당시 강릉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향현 배향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향현의 면면을 보면 군자에서 효자·철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강릉이 낳은 수많은 인물 중에서 이 열두 명을 선정했던 데에는 그 나름의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지역의 당대 거성(巨姓)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향현으로 배향하려는 노력도 엄청났을 것이다. 향현이 추배(追配)된 시기였던 18세기는 족보 편찬이 일반화된 때였으니 말이다. 12향현의 대부분이 강릉의 거성 출신으로 네 차례에 걸쳐 추행되었지만 그때마다 다른 거성들의 큰 반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향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정표정책에 따라 효행이 빼어난 인물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강릉향현사지(江陵鄕賢祠誌)』에는 이들 12향현의 행적과 인물, 관련 유적이 실려 전한다.
[내용]
자는 백경(伯卿), 호는 조은(釣隱)이다. 고려시대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생원 안린(安麟)이고, 어머니는 정선전씨 낭장(郞將) 전인구(全仁具)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19세의 나이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고, 23세에 강릉향교가 전소되자 공장(供狀)을 올려 향교를 중수하도록 건의했다. 1417년(태종 17) 식년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서는 주로 승문원(承文院)·집현전(集賢殿) 등에서 근무하였고, 사대문서 관장의 적임자로 논의될 정도로 중국 이문(吏文)에도 정통하였다. 집현전 수찬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학문적 깊이를 말해주는 사례다.
최치운은 모두 5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세종 21)에는 공조참판으로 계품사(啓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범찰(凡察)·동창(童倉) 등의 야인들이 양민으로 경성 지역에 영주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에 세종은 최치운을 인견하여, 주청(奏請)하여 허락을 얻은 사유를 물은 후 위로하고, 안장을 갖춘 말 1필과 전(田) 30결을 하사하였다.
또한 세종은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려는 취지로, 최치운에게 『무원록(無寃錄)』을 주해하도록 하였다.
최근에 현대적으로 각색되어 출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무원록』은 옥사와 관련된 검시 지침서 같은 책이다. 최치운이 주해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경국대전』 단계에 와서 조선의 공식 법의학서로 규정되었다. 최치운과 관련된 유적으로 삼현비각, 감모재가 대전동에 있다.
자는 성시(聖始), 호는 눌재(訥齋)다. 아버지는 이장밀(李長密)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호장(戶長) 최하(崔河)의 딸이다. 이장밀은 고려말 호조전서(戶曹典書)로 있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에 따라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퇴거하였다. 이장밀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성무·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良茂)다. 이성무는 강릉 호가리(虎街里)[지금의 옥천동]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 사람들이 백원당(百原堂)이라 불렀다. 이성무 선생의 사형제 우애는 남달리 두터웠다. 선생은 항상 아우들에게 이르기를 “부모를 섬기는 데는 아무리 몸과 마음을 다한다 하더라도 넉넉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니, 우리 형제는 힘을 다하여 부모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고 하였다.
이성무는 학문이 깊었고 문장도 뛰어났지만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부친을 본받아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고 독서와 효우(孝友)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신하의 도리는 어긋남 없이 이행하였는데, 예를 들어 당시 동해안에서 진상하는 어류로 송어와 연어가 있었는데 이들 어류를 나라에 진상하기 전에는 절대로 먹지 않았다. 또 태조와 정종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는 부모상과 같이 3년 동안 상주의 예를 갖추었다 한다. 이러했으니 부모에 대한 효성에 대해서는 오죽했으리.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죽만 먹었고 의대(衣帶)를 벗은 일이 없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로 더욱 지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셨다. 74세의 노령에 모친이 중한 병으로 눕게 되자, 한겨울에 잉어를 잡아 대접한 이야기도 전한다.
이런 일에 대해 “하늘이 낸 효자[出天之孝子]”라며 모든 사람이 감탄하던 중에 소문이 조정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태종은 그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1417년 4형제에게 효자정려(孝子旌閭)와 사정(司正)의 벼슬을 내리고, 선생에게 사헌부 감찰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잉어를 얻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며, 아직도 효성과 우애가 모자라는데 포상이 너무나 과분하여 부끄럽다고 하였다. 그 후 이양무의 후손인 이당(李堂)과 이민 형제가 숙종 때 효자정려를 받았다. 강릉시 교동 군정교(郡丁橋) 옆에 이성무의 4형제와 이당 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영해이씨 2세6효지려(二世六孝之閭)’이다.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헌(睡軒)이다. 아버지는 최치운(崔致雲)이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강릉함씨 현령(縣令) 함화(咸華)의 딸이다.
13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예를 갖추고 3년상을 마쳐 향당(鄕黨)에서 효자로 칭송받았다. 그 후 학문에만 힘써 1448년(세종 30)에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1454년(단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강릉훈도(江陵訓導)를 자청하였다. 1463년(세조 9)에 강원도사(江原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다음해에 고성군수로 부임하였고, 얼마 후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1480년(성종 11)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여묘를 떠나지 않았다. 상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그 효성을 기려 사헌부집의(종3품)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이조·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대사헌, 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 한성부좌윤과 형조·공조·병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484년(성종 15) 7월에는 개성부에서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한 옥사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여 임금이 말 1필을 하사하였다.
최응현의 강직한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그가 대사헌에 재임할 당시의 일을 들 수 있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인척 윤탕로가 성종 국상기간인 졸곡(卒哭) 전에 기생과 동거한 것이 드러나자, 최응현은 왕비의 지친으로 이런 행위는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윤탕로를 파직시켰다. 나아가 이를 제지하지 못한 당시 영의정 노사신(盧思愼)도 처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가 연산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사직했다. 그는 예학에도 밝아 『상례고정편(喪禮考正篇)』을 저술하였고, 관련 유적으로 삼현비각과 묘소가 대전동에 있다.
자는 도원(道源), 호는 춘헌(春軒)이다. 고려조 평장사(平章事) 입지(立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교수(敎授) 최여남(崔汝南)이고, 어머니는 정선전씨 생원 전무(全務)의 딸이다.
1466년(세조 12)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동 일대를 순시할 때 오대산 어림대(御臨臺)에서 별시를 개최하였다. 이때 숭불문(崇佛門)과 벽불문(闢佛門) 두 개를 설치하고 무사들로 하여금 벽불문을 지키게 하였다. 모두가 숭불문으로 통과하였는데, 무사들이 철추로 내리치려 하는데도 최수는 벽불문을 통과하려 했다. 이에 왕이 그 기개에 감복하여 의사(義士)라고 칭하였다 한다.
최수는 성종 대에 단종의 복위를 간하였다. 또 당시 강릉 염양사(艶陽寺) 승려 학열이 영남에서 면포를 사다가 비싼 값으로 백성에게 강매하다가 백성들이 응하지 않으면 결부(結卜)의 수를 헤아려 강제로 나누어주었다가 추수 때가 되면 성화같이 독촉을 하여 백성이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시정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468년(세조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1472년(성종 3)에 진잠현감(鎭岺縣監)으로 나갔다가 3년 만에 병을 얻어 30세에 세상을 떠났다. 관련 유적으로 장현동에 묘소, 송파정,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자는 덕수(德叟), 호는 괴당(槐堂)이다. 아버지는 사정(司正) 김여명(金汝明)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 평의(評議) 김지(金遲)의 딸이다.
성품이 덕성이 높고 학문을 좋아하여 사서삼경을 베껴 써서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늘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데 힘썼다.
1468년(세조 14)에 생원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1469년 2월 강릉 사람 선략장군 남윤문과 함께 글을 지어 강릉부 사람 전윤(全崙)에게 주어 상소하였다. 승려 학열의 비행을 비판한 내용이었는데, 당시 학열은 보시를 빌미로 재산을 축적하면서 민간에 많은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윤신은 학열의 이 같은 비행을 시정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1476년(성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사록(司祿), 전적(典籍), 주부(主簿), 경상도사(慶尙都事)를 거쳐 전중감찰(殿中監察)이 되었다. 이후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임금은 “내가 듣기로 경은 부친의 5년 장병(長病)에 한 번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간호하였으니 어찌 대효(大孝)가 아니며, 경이 나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였으니, 어찌 충성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금성현령(金城縣令)에 임명하여 부모를 봉양케 하였다. 그 후 내직(內職)으로 사헌부 장령, 집의, 의정부사인을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파주와 원주 목사(종3품)를 지냈다.
김윤신은 성품이 공명정대하여 가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큰 고을의 벼슬을 여러 차례 지냈으나 집에는 가재도구 하나 없어 세상 사람들이 선생의 청백을 칭찬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올 때 부사가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로 영접하였다. 젊었을 때는 금란반월회원이었으며, 만년에는 향좌수로서 향령(鄕令)을 지어 문풍교화에 힘썼다. 관련 유적으로 저동에 묘소, 신도비, 숭덕재(崇德齋)가 있다.
자는 대관(大觀), 호는 강호(江湖) 또는 사지(四止)·사휴당(四休堂)이다. 아버지는 박시행(朴始行)이고,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진사 남과(南薖)의 따님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자세가 단정하였으며, 아무리 추운 날이나 더운 날에도 의관을 정제하여 위엄을 잃는 일이 없어 모두 선사(善士)라고 칭찬했다. 1495년(연산군 1) 26세의 나이로 생원이 되었으나, 수신(修身)과 독서에 힘쓸 뿐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1516년(중종 11) 가을에 충암(沖庵) 김정(金淨)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만나본 후 그 사람됨에 탄복하였다. 김정이 서울에 돌아가 중종에게 적극 추천하여 3년 후인 1519년 현량과에 천거되어 홍문관저작과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돌아와 박수량과 더불어 왕래하며 경학을 논하면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박공달은 박수량과 함께 강릉부 북쪽 사화촌(沙火村)[사천] 해안 위쪽에 위치한 쌍한정(雙閒亭)으로 날마다 산책을 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고고한 인품을 널리 인정받았다. 선생의 행적은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과 『기묘당적(己卯黨籍)』·『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 등에 수록되어 있다. 관련 유적으로 운정동에 묘소와 모선재(慕先齋)가 있다.
-삼가당 박수량-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당(三可堂)이다. 아버지는 교수(敎授) 박승휴(朴承休)이고, 어머니는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성품은 호탕한데다 거리낌이 없어 격식을 갖추거나 꾸미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잡인들이 스스럼없이 굴어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고, 충효의 큰 절조가 있어 후세 사람들이 선사라 일컬었다.
1504년(연산군 10) 3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선생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마침 연산군이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할 당시였다. 단상제는 3년 동안 여묘에 거처하며 거상하던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거상하자는 것으로, 연산군은 상제의 개혁을 추진하여 1505년 신료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상(國喪)과 사대부의 친상(親喪)은 달을 날로 계산하여 27일 만에 탈상하라고 지시했다. 연산군은 이후에도 “왕명은 중한 것이니, 사(私)를 따르고 공(公)을 폐하여서는 안 된다”면서, 왕명을 엄중히 준수할 것을 전교하였다. 그러나 박수량은 “차라리 쇠망치로 맞아서 죽을지언정 선왕 때부터 지켜온 법은 어길 수 없다” 하여 여막에 거처하며 3년상을 치렀다. 이 일로 1508년(중종 3) 살아생전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았다.
박수량은 당시 가장 큰 문제이던 토지 소유 불균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518년(중종 13) 5월에는 중종이 천거인들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토지제도의 개혁 즉 균전법 시행을 건의 주장하였다. 후일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는데, 중종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던 날, 중종이 “순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선생은 “신이 시골에 살았으므로 풀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그 맛이 썼으면 지금도 그 풀은 쓰고, 옛날에 단 풀은 지금도 그 맛이 단 것입니다. 풀의 성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인간의 본성이 또한 어찌 고금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고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탄복하여 선생을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숙인 박공달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냇물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언제나 함께 지냈으며, 바닷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노니니 세상 사람들이 쌍한정(雙閒亭)이라 했다. 『삼가집(三可集)』이 후손에 의해 엮여 전해온다. 관련 유적으로는 사천면 방동리에 묘소와 미노리에 쌍한정, 박수량 생정비각 등 삼가봉유적과 오사재(五思齋)가 있다.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이다. 증조는 최치운(崔致雲), 조부는 최응현(崔應賢), 아버지는 생원 최세효(崔世孝)고, 어머니는 철원최씨 승지 최철관(崔哲寬)의 딸이다.
4~5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이르자 문장이 대성하여 글과 그림에 능했다고 한다. 이처럼 시문·서화·음률·수학 등에 모두 능하였기에 ‘사절(四絶)’이라 일컬어졌다. 기묘사림 가운데 한 사람인 김정(金淨)은 일찍이 최수성의 시를 사랑하여 영원히 이름을 남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최수성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하였다. 조광조가 김굉필에게 수학하게 된 것은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마침 김굉필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에 유배되어 있었기에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수성이 김굉필에게서 언제 어디에서 수학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가 김굉필과 학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부인 최응현이 김종직·김굉필과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로 인해 영남 사림들과 자연스럽게 교우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광조 등이 최수성을 현량과에 천거한 것은 물론 김굉필과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이요 조광조와는 동문이라는 점이 작용했겠지만, 김굉필과 성수침(成守琛)이 선생을 기묘명현 가운데 최고로 인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최수성 선생이 학행과 덕행, 성리학적 소양 등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수성은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옥사했는데 이는 남곤과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에 의하면, 어느 날 최수성이 노천(老泉) 김식(金湜)의 집에 들렀는데 마침 남곤(南袞)이 찾아왔다. 공이 누워서 일어나지 않기에 남곤이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노천은 숨어 사는 최원정이라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남곤이 돌아가자 공이 큰 소리로 노천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남곤과 같은 간사한 사람들과 교유하는가!”라고 말했는데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최수성이 처형당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이 있다. 『대동야승』에는 남곤이 최수성이 붙인 산수화의 제목을 보고 원한을 품었다는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최원정화 풍남태설(崔猿亭畵 諷南台說)』에 보다 자세히 나타난다.
심정·남곤 일파가 몰락하고 사림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1540년(중종 35)에 최수성 선생은 신원되어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545년(인종 즉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적으로 대전동에 묘소와 삼현비각이 있다. 또 황산사 문정묘와 제비리에 화동서원 충정사가 있고, 충북 보은군 마노면 관기리에 고봉사(孤峰祠)가 있다.
자는 열지(說之), 호는 임경당(臨鏡堂)이다. 아버지는 진사 김광헌(金光軒)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현감 최세번(崔世蕃)의 딸이다. 아버지 김광헌은 1519년(중종 14) 진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를 겪고 난 후 벼슬의 뜻을 버렸다. 김열이 과거에 나아가지 않은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김열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오직 글 읽기에만 힘썼다. 아무리 춥고 더워도 의관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열의 어머니는 백세를 살았는데 뜻이 곧고 마음은 온화하였다. 어머니가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법도를 지키고 종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였다. 선생은 세 아우와 함께 어머니의 뜻을 받들기 위해 성심을 다하였다.
김열은 아우들이 열심히 학문을 하지 않으면 타일러서, 모두가 자기 지위를 확고하게 세워 사회에 나가 출세하도록 하였다. 성장하여서는 손수 이들의 혼사를 도맡아 처리하였고, 모두 1리 안팎에 모여 살도록 하여 아침 저녁 만나볼 수 있게 하였다. 술이나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함께 모여 나누었고, 아우가 궁핍하면 형제들이 서로 보태어 도와주었다.
평생 공부에만 힘쓴 그는 『시경』·『서경』·『주역』·『춘추』 등 고전의 해석문을 지어 자손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해석이 손으로 집는 듯 명료하였다. 중종 때 선생의 효성을 기려 효렴과(孝廉科)로 평강훈도에 임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만년에 경포호수 북쪽에 임경당(臨鏡堂)을 짓고 “모든 선현의 글들을 책상과 궤에 가득히 채워 때로는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때로는 강호의 정취에도 젖어본다”라는 제자(題字)를 써 걸었다. 이처럼 영화(英華)에는 전혀 뜻이 없었으니, 그 때 사람들은 ‘김처사(金處士)’라 불렀다.
김열의 집 앞에는 선친이 손수 심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었는데, 그는 아우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기르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도의지우(道義之友)로 사귀던 이이에게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선친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우리 형제 모두가 이 집에서 저 소나무를 울타리로 삼고 지내고 있네. 그래서 이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선친을 생각하곤 한다네. 이러한 소나무를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 도끼나 낫으로 베고 잘라 후손들에게까지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없어질까 늘 두려운 마음뿐이라네. 그대가 이를 보호할 수 있는 교훈될 만한 말을 몇 마디 써주면 집안 사당 벽에 걸어 놓고 자손들로 하여금 늘 이를 보게 하여 가슴 깊이 새기게끔 하겠네.” 하니, 이이가 「호송설(護松說)」을 지어 주었다.
김열은 사화를 예측하고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고관에게 ‘송어시(松魚詩)’를 주어 화를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달관(達官) 한 사람이 강릉에서 벼슬하다 영전하게 되었을 때, 그는 비단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송어 배에 넣어 그 사람에게 보냈다. 그 시에는 “은비늘 번뜩이며 기력이 왕성하니 벼슬길 확 트여 높은 곳 오르겠네. 아깝도다! 나아갈 줄은 알았지 물러날 줄 모르니, 넓고 넓은 이 세상 잃을까 염려되네.”라고 써 있었다. 이 글을 본 달관은 병을 칭하고 벼슬을 사양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사화가 일어났고 그 홀로 화를 면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김열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김열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오봉리에 묘소가 있고, 금산리에 임경당과 상임경당이 있으며 이곳에 시판도 전한다.
자는 담지(譚之), 호는 보진재다. 아버지는 낭장(郞將) 김광복(金光輻)이고, 어머니는 삼척심씨 군수(郡守) 심희전(沈希佺)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초시에 뽑혔으나 중국의 골상가(骨相家)가 김담의 관상을 보고 “골상은 귀하게 되겠으나 오래 살기 힘들겠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 ‘내가 일찍 죽으면 부모는 누가 봉양하겠느냐’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부모 봉양에만 힘썼다. 부친이 병이 났을 때는 똥을 맛보기도 하였고, 아침저녁으로 북두칠성에게 자신의 목숨으로 부친의 수명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슬퍼함이 이를 데 없었고 제상에 술잔을 올리면 산 사람이 마시는 것처럼 술잔이 저절로 말랐다고 한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때는 죽만 먹었고, 하도 울어 눈에서 피가 나와 눈이 멀었다.
김담의 눈이 안 보이게 되자 아들 김경황(金景滉)과 김경시(金景時)가 성심을 다하여 효도했고, 그 지극한 효성으로 눈이 보이게 되었다 한다. 인종, 명종의 국상 때에는 3년간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으며, 친척이나 친구의 상에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부사가 여러 번 김담의 충효를 관찰사에게 추천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상직(賞職)이 내렸으나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다.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김담을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때 진부면과 대화현에 가뭄과 황충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양사언이 다시 간청하여 김담은 진부면에서 2년, 대화현에서 3년간 판관(判官)의 일을 섭행하였다. 그로부터 황충이 날아들지 않고 창고의 곡식이 넘치니, 양부사가 “하늘이 효자를 먼저 알고 도왔다.”고 하였다.
김담의 나이 70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 애통해함이 이전의 부친상과 같았다. 그 후 그는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다. 선조 임금이 정려를 내렸으며, 아들 김경황과 김경시, 손자 김한이 모두 효도로써 정려하니 사람들이 ‘3세 4효(三世四孝)’의 가문이라 칭하였다. 삼세사효지려의 효자각이 강릉시 입암동에 있으며, 장현동에 묘소와 숭모재(崇慕齋), 기적비가 있고, 노암동에 보진재(葆眞齋)가 있다.
자는 덕수, 호는 농헌(聾軒)이다. 아버지는 박수량의 조카 선무랑(宣務郞) 박구량(朴久良)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신로(崔信老)의 딸이다.
박수량의 문하에서 학문과 도의를 익혀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효성 또한 출천하였다. 부친이 7년 동안 병을 앓았는데 박억추는 들오리가 병에 좋다는 말을 듣고 이를 잡으려 하였다. 추운 겨울이라 하천이 꽁꽁 얼어붙어 그물을 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한 쌍의 오리가 우물가에 내려앉았다. 박억추가 마음속으로 오리가 잡히기를 기도하면서 돌을 던졌는데, 한 돌에 두 마리 오리가 맞아 떨어졌다. 그것을 아버지께 드렸더니 병이 씻은 듯 나았다. 그가 오리를 잡았던 ‘차돌백이’ 우물이 강릉시 노암동에 있었다. 그 후 부친이 또 병에 걸렸을 때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잠시 소생케 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하여 상제를 치렀다. 그 효성이 마침내 나라에 알려져 복호(復戶)되고 정려를 받았다.
1563년(명종 18)에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어 사옹원 참봉이 되었다. 1566년(명종 21)에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옮겼다가 영평군수(永平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내다 1580년(선조 13)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3개 군현을 역임하면서 청검(淸儉)과 효제(孝悌)로써 민속을 순화하는 데 힘썼다.
관련 유적으로 박월동에 박억추효자각이 있고, 묘소는 운정동에 있었으나 2001년 성산면 관음리 납골종묘로 옮겼으며, 노암동에 효성과 관련된 타압정(打鴨亭)이 근래에 조성되었다.
자는 시중(時中), 호는 학구(鶴衢) 또는 향호(香湖)이며, 만년에는 도경(稻景)이라 하였다. 문한공(文漢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최호(崔浩)고, 어머니는 진주강씨(晋州姜氏) 참봉 강준지(姜俊智)의 딸이다. 12향현 중 연배가 가장 아래다.
성품이 너그럽고 순후하여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한다. 1552년(명종 7) 생원에 급제하였고,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는 못했다. 김광진(金光軫)에게서 수학하였고, 1554년(명종 9)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으며, 이이와는 24세 때부터 교류하며 도의지교로 사귀었다. 당대의 유학자인 성혼·정탁·정유일·양사언 등과도 교류하면서 학식을 쌓았다.
36세 때인 1567년(명종 22) 이이가 보낸 글에서 나타나듯이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근본으로 하는 실학으로서의 성리학에 깊이 심취했으며, 이이와 학문을 함께 논했다. 선생은 대화(大和)와 평창의 합병에 대해서도 이이와 서신을 주고받는 등 민생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시무(時務)에 관해서도 깊은 논의를 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학문적 깊이를 평가할 수 있다. 사람들이 최운우의 학문과 인물을 평해서 ‘성리학에 힘썼고, 품행은 정몽주’라고 했다. 후일 송시열도 묘표(墓表)를 지어 그의 높은 뜻을 추모하기도 했다.
최운우는 향리에 있으면서 1556년(명종 11)에 칠봉(七峯) 함헌(咸軒)과 함께 오봉서원 건립에 앞장서는 등 풍속교화와 문풍 진작에 남다른 노력을 보였다. 1600년(선조 33)에 「연곡향약」을 시행하게 되는데, 최운우는 강릉부 전체를 관장하는 도약정(都約正)으로 향약을 운영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연곡향약」은 이이의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어, 풍속교화에 대한 서로의 뜻이 통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연곡향약」 시행은 기묘사류들이 성리학 보급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여씨향약」 보급에 힘쓴 일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운우는 『향호집(香湖集)』을 남겼으며, 관련 유적으로 주문진 향호리에 묘소가 있고, 양양군 현남면 원포리에 화상암(和尙岩)과 향호변 향호정터에 유훈이 살아 있다.
이 열두 선비가 배향된 향현사에서는 해마다 제례를 올린다. 열두 선비들은 강릉을 관향으로 하는 거성(巨姓), 즉 최씨, 김씨, 박씨와 영해이씨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각 성씨별로 따로 제례를 올린다. 또 강릉유도회가 주관하여 매년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12향현 추모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12향현과 관련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1721년(경종 1)에 최하중(崔夏重)·최이옥(崔以沃)·김원진(金元璡) 등이 당시 유림의 총의를 모아 먼저 배향된 7현의 사적(事蹟)과 세계도(世系圖)를 편수하였다. 그 후 1915년 김윤신의 후손이 12현의 행장을 만들었으며, 이어 1930년 가을 제향에서 유림과 후손들이 12향현의 행록을 간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후손에게서 행장과 자료를 수습하여 한 권으로 편집하여 1931년 『강릉향현행록(江陵鄕賢行錄)』을 간행하였는데 사실 이것이 『강릉향현행록(江陵鄕賢行錄)』의 초간본이며 원본인 셈이다.
1976년 강릉향현12선생기념사업회가 『향현사지(鄕賢祠誌)』로서 『강릉명륜서원지(江陵明倫書院誌)』를 편찬하였으며, 2005년 4월 앞서 발간되었던 『강릉향현행록(江陵鄕賢行錄)』과 『강릉명륜서원지』에 이은 속편으로 『신속강릉향현사지(新續江陵鄕賢祠誌)』가 편찬 발간되었다.
열두 명 옛 선비들의 삶과 자취를 살펴보았는데, 기록으로만 볼 때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일생을 꼿꼿하게 걸어간 선비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옛 사람들의 삶이라고 해서 어찌 시련이 없고 유혹이 없었을까. 다만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들은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었고, 그 결과가 오늘과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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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3 | 정의 수정 | 강릉 12향현,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 |
2014.06.03 | 정의 수정 | 강릉 12향현,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 조선시대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 |
2014.06.03 | 정의 수정 | 조선시대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 => 강릉 12향현,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
2011.12.01 | 2011 한자 최종 검토 | 최필달(必達)의 후손으로, 진령현감(鎭岺縣監)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진잠현감(鎭岺縣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