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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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地方-傳統建築文化遺産 |
영어의미역 | Architectural Heritage of Gangneung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김흥술 |
[정의]
근대 이전에 조성된 건축물로서 강릉 지역에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을 용도와 성격에 따라 관아건축, 향교 건축, 민가 건축, 누정 건축, 사찰 건축 등으로 나눠서 살펴본다.
[개설]
-옛집 구경 가는 길 -강릉 지역의 전통 건축 문화유산
강릉은 옛날부터 백두대간의 동쪽, 동해안 지역 동예(東濊)의 고도로서 영동 고을의 수부 지역이다.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이 따뜻한 해양성 기후이며, 들과 바다와 산이 함께 있는 다양한 문화전통을 가진 곳으로 건축문화 또한 다양하다. 선사시대와 고대의 건축문화는 문화재 발굴 유구를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안인리. 병산동, 방내리 주거유구 등이 근래에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전통 건축물을 중심으로 강릉의 전통 건축 문화유산을 살펴보자.
먼저 전통 건축물을 그 용도와 성격에 따라 관아건축, 향교 건축, 민가 건축, 누정 건축, 사찰 건축 등으로 나눠서 살펴본다.
관아 유적으로는 강릉 지역에서 가장 오랜 건축유산인 강릉 객사문이 있고, 옛 강릉부사의 집무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 칠사당이 있다.
향교 건축으로는 강릉 향교가 있고, 근세에 복원되었지만 오봉 서원, 송담 서원이 있다. 향교는 제사공간과 강학공간으로 이루어지므로 제사공간으로서의 건축물인 사우(祠宇)들이 향교 내부에 각 종중별로 산재해 있다.
민가 건축으로는 조선초기 사대부가옥의 별당건물인 오죽헌, 조선중기에 조성되기 시작한 선교장, 임경당, 상임경당 그리고 조선 후기의 김윤기 가옥, 오규환 가옥, 허균과 허난설헌의 탄생과 관련된 곳으로 전하는 초당동 이광로 가옥 등이 있다.
누정 건축은 관아에서 주체가 되어 건립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유력한 종중에서 사적으로 건립하기도 했고 계(契)와 같은 조직을 통해 건립되기도 하였다. 경포대, 방해정, 호해정, 해운정, 선교장의 활래정, 금란정, 오성정 등이 남아 있다.
사찰 건축은 신라 말기 굴산사, 보현사, 한송사로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건축문화 유산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실되고 근대에 복원되어 옛 자취를 보여준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굴산사지의 당간지주와 부도, 보현사 낭원대사의 오진탑과 탑비 등 석조 문화재가 일부 있고,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보현사 대웅전이 있을 뿐이다.
-강릉 지역의 관아 유적-
전통 시대 각 고을에 조성되었던 관아는 고대에서 근대, 오늘에 이르는 동안 도심지를 범칭하는 말로 쓰였다. 관아라고 하면 도성이나 읍성 오늘날엔 행정타운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관아는 건축물의 조영 원칙에 따라 전통적 공간 속에서 일정한 법칙성을 갖고 있다.
전통 시대 관아는 지배층의 입장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공간으로서 조성되었으며, 지배 계층의 주도로 조성되었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체제의 유지를 위해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였던 유교와 앞 시대부터 있어온 민족문화정서를 함께 내재하고 있는 건축물이 관아다. 관아는 일시에 조성된 것이 아니고 시대에 따라 점차적으로 확대 조성되었다. 강릉의 관아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멸실되었으며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임영관 터에 객사문이 있고 강릉 부사의 집무공간이었던 칠사당이 남아 있다. 2000년부터 강릉이 전통문화 시범도시 조성 사업으로 임영관지에 임영관 복원공사를 추진 중이며 중대청과 전대청이 2005년 건립되었다.
객사문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으며, 강릉시 용강동 58-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관아 건축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의 목조 건물로 고려 초기에 처음 건축되었다. 객사문은 고려 태조 19년(936)에 창건된 객사의 유물로, 현존하는 건물은 고려 말기의 건축물로 보인다. 이 문에 걸려있는 제액의 글씨 "임영관(臨瀛館)"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객사문은 앞쪽이 비교적 높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둥근 자연석을 배열하였으며 기초석은 몇 가지 다른 모양의 돌을 이용했다. 앞 뒷줄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주를 사용하였고, 가운데 줄의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여 문을 달았다. 기둥의 배흘림은 그 어느 건물보다도 심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인상을 준다. 장식화 경향이 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國寶 제49호, 1308년 건립]보다 건축 연대가 앞선 것으로 생각된다.
흔히 객사는 여관과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객사는 지방의 수령이 초하루,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 서울의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하여 예배를 하는 것)하며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던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임영관의 전대청(殿大廳)에는 원래 궐패를 모셨으며, 임진왜란 후 한때 태조의 영정을 모신 집경전이 있었다.
칠사당(七事堂)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강릉시 경강로 2045[명주동 38-1번지]에 있다. 규모 및 양식은 정면 7칸, 팔작지붕 단층건물로 조선중기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인조 10년(1632)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확장 중수하였다. 순조 24년(1824) 지방수령의 칠사(七事) 즉 호구(戶口)의 확대, 농상(農桑)의 진흥, 군정의 엄정, 학문의 진흥, 부세(賦稅)의 균정(均正), 송사의 공명, 풍속의 순화 등 일곱 가지 정사를 보는 곳이라 하여 칠사당이라 하였다. 한때 진위대(鎭衛隊)의 청사로 쓰이다 고종 4년(1867)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수하였다. 건물은 ㄱ 자형의 건물인데 정면 좌측에는 누마루가 연접하여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수비대에서 사용하다가 강릉군수 관사로 한동안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때에는 미국 민사원조단(C.A.C.K)에서 사용했다. 1958년 5월부터는 강릉시장 관사로 한동안 사용되기도 하였다. 1980년에 다시 정비 복원하였으며 여러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향교 건축의 유형-향교와 서원-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 유교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다.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였다. 도성을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으로 유학 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 시대부터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근본적인 교화정책의 하나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중앙정부는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에 명하여 향교를 만들고, 운영되는 정도에 따라 지방관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등 강력한 진흥 정책을 펼쳤고, 이에 힘입어 성종 때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공간이며 강학 장소인 명륜당이 맨 앞에 배치되고, 그 좌우로 지금의 기숙사처럼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뒤에는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한 대성전이 위치하고 대성전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동무, 서무 및 대성전 주위로 성현 제사와 유생 교육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강릉 향교 내에는 향교중건발(鄕校重建跋) 등 향교 건물의 중수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 충선왕[1313]에 강릉존무사 김승인이 화부 연적암산 아래에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향교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태종 13년(1413)에 강릉대도호부판관 이맹상이 옛터에 향교를 다시 세웠다. 성종 16년(1485)에 중수를 시작하여 4년만인 1488년 부사 이칭이 공사를 완공하였다. 16세기에 들어서 명종 10년(1555)에 강원관찰사 이인서가 향교를 중수하였다. 광해 2년(1610)에 부사 김륵이 동서무와 명륜당을 중수하고 연못을 파서 천운지라고 명명하였다. 인조 원년(1623)에 부사 유영순이 향교를 중수, 인조 22년(1644)에 부사 강백년이 명륜당을 중건, 효종 2년(1651)에는 부사 이만영이 향교를 중수, 숙종 10년(1669)에는 부사 여민제가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숙종 10년(1684)에는 부사 목림유가 전사청을 조성하였으며, 숙종 22년(1696)에 명륜당을 숙종 26(1700)에는 동서무를 각각 중수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도 향교 중수가 계속되었는데 경종 원년 (1721)에는 대성전과 월랑을 중수, 영조 14년(1738)에 명륜당 동쪽에 교관의 거처인 정양재를 중건, 영조 32년(1756)에는 명륜당, 영조 52년(1776)에는 재방, 정조 11년(1787)에는 대성전과 동서무, 정조 24년(1800)에는 대성전을 각각 중수하였고, 순조 7년(1807)에는 동서무를 중수하고 서재를 중건하였다. 순조 9년(1809)에는 제기고 번와공사를 실시하였고, 순조 13년(1813)에는 명륜당, 순조 25년(1825)에는 동재를 중수하였다. 고종 6년(1869)에는 대성전, 명륜당, 서재, 전사청 등을 중수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도 향교 중수는 계속되었는데 광무 8년(1904)에는 대성전, 동·서무, 등이 중건되었고, 1907(융희 1)에 동·서재를 새로 만들었다. 1909년(융희 3)에는 향교 명륜당에 화산학교를 만들었으나 2년 후인 1911년 폐지되었다. 1917년 동·서무, 명륜당을 1920년에는 제기고를 수리하였다. 1921년에는 대성전, 동·서무를 수리하고 전사청의 방도 중건하였다. 1922년에는 수선강습소를 열어 명륜당의 창호를 유리로 바꾸는 공사가 있었다. 1924년 천운지를 파서 연꽃을 심었고 1926년 대성전 천장을 설치하고 외부 단청공사를 하였다. 1931년 향교 마당공사와 명륜당 설책, 담장신축공사 등을 실시하였다. 1932년에는 홍살문을 중건하고 명륜당 단청 공사와 기와 개량 공사를 실시하였다.
1949년에는 명륜 중고등학교가 향교에서 개교하였다. 1962년 명륜당과 동·서재를 중수하고 동재는 새로이 중건하였다. 1971년 퇴락한 동·서무 중수와 담장 개축공사를 하였다. 1979년 동·서무, 동·서재, 명륜당, 신삼문을 보수하였다. 1980년에는 동·서재 마당 박석포장과 창고 등 부속건물 2동에 대한 보수공사와 교직사 담장 개축공사를 실시하였다. 1984년 대성전, 동·서무, 명륜당과 회랑보수공사를 하였고, 1987년 동·서무, 재실, 등을 수리하고 명륜당 전면에 외삼문을 세우고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천운지를 교직사 앞으로 이전하였다. 1989년 명륜당 앞 담장공사를 하고 출입문, 신문 등을 신축하였다.
최근 1989년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무를 보수하였고 1995년 대성전, 동·서무를 보수하고 대성전 마당을 포장하였다.
강릉 향교는 강릉시 명륜로 29[교동 23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가 입지하고 있는 곳은 화부산 아래의 산록이지만 도시화가 진행되고 명륜 고등학교가 생기면서 주변에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조선 시대 향교의 주변여건과는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현재 강릉 향교는 강릉 시내를 지나는 국도변 화부산 기슭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향교의 전면에는 명륜 고등학교 운동장이 있으며 향교가 있는 주변 구릉 화부산은 소나무들이 우거져 과거 향교의 입지를 상상하게 해준다.
15세기 숙종 연간 강릉 향교를 재건할 당시 향교의 규모는 70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644년 명륜당을 중수할 당시의 규모는 읍지에 따르면 59칸으로 기록되어 당초보다 규모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강릉 향교는 경사지에 2개의 단을 만들어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명륜당, 동·서재의 강학공간과 대성전, 동·서무의 제향 공간에 석축을 쌓아 구별하였다. 다른 지역의 향교는 경사가 완만한 편이나 강릉 향교는 비교적 경사가 심하여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이 높은 석축에 만든 계단으로 연결되고 있다.
향교의 전면에는 세 곳의 문이 있는데 중앙의 일각문과 좌우 협문이다. 협문은 일상 출입에 이용하고 중앙의 일각문은 행사 때 사용한다. 문을 들어서면 전면 11칸의 기다란 누각 형식의 명륜당이 들어서 있다. 가로 방향으로 긴 명륜당은 향교 후면의 나지막하고 길게 늘어선 구릉과 어울리며 전체적으로 수평성을 강조하고 있다. 명륜당 하부는 출입이 가능하도록 벽체로 막지 않고 개방되어 있다. 명륜당 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동·서재가 마주 보고 있다.
석축에 놓인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전랑이 시야에 가로놓여 있다. 다른 향교들이 담장 등으로 제향공간을 구분하는 것과 달리 강릉 향교는 석축 위에 만든 전랑을 이용해서 공간을 구분한다. 전랑 중앙의 문을 들어서면 대성전과 좌우의 동·서무가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중앙의 문은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 아니며 제향 때만 열어 놓는 신문이다. 전랑은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의 레벨 차이를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강릉 향교는 이른 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의 배치를 하고 있다. 그냥 봐서는 대성전과 명륜당은 평행선상에 놓이고 동·서무와 동·서재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성전은 약간 서향으로 기울어져 있고, 좌우의 동·서무와 동·서재가 이루는 영역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는 아니지만, 정확한 정방향이 아닌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중간에 향교의 중심공간인 대성전과 명륜당이 배치되고 좌측에는 교직사가 우측에는 재방과 제기고 등의 영역이 부가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 강릉 향교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교직사, 재방, 제기고, 화장실 등의 건물과 일각문, 협문, 진학문 등의 문이 있으며 강릉 향교묘정비 등 비석 2기가 남아 있다. 교직사 앞에 연못 천운지가 있다.
강릉 향교의 건축적인 구성을 제향역역과 강학영역으로 나눠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제향영역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문묘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주심포 건물이다. 정면 1칸은 제향 시 배례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벽체 없이 개방되어 있다. 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 바닥 면은 전돌로 마감하였다. 전돌은 건물 기단 위에서부터 전면 퇴칸까지 같은 재료를 사용하였다. 기단 정면에는 계단을 두지 않고 좌우기간에 하나씩 계단을 두었다. 전면 중앙에는 최근에 만든 신도석(神道石)과 관세대를 설치하였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윗면을 가급적 평평하게 다듬은 것과 굴곡면을 그대로 사용한 2가지로 구성된다. 초석 중에는 윗면을 원형과 방형으로 새긴 것도 있다. 기둥은 안팎의 기둥이 모두 원형기둥을 사용하였고 배흘림을 두었다.
대성전 건물 내부는 전돌 대신 화강석 박석을 깔아 마감하였다. 중앙에 공자를 비롯한 5 성현의 위패를 위에서 보아 ㄷ자형 위패함을 만들어 봉안하고, 공자의 제자 10인 즉 공문십철(孔門十哲)과 송나라의 6현인 즉 송조육현(宋朝六賢)은 양 측면 벽체에 붙여 단을 만들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대성전은 정면 5칸인 대규모의 당당한 품격을 지닌 건물로 기둥도 직경이 굵은 부재를 사용하였다.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이른바 주심포 형식의 건물이다. 공포의 구성형식을 보면 기둥 위에 첨차를 놓고 외목도리를 받치게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도리는 5개의 굴도리를 사용한 5량집이다. 벽체는 전체적으로 회벽으로 만들었다. 전면 퇴칸의 서측벽은 회벽이 아닌 판장벽으로 처리하였고 우측은 벽체 없이 개방한 모습이다. 전면 벽체 중 퇴칸을 제외한 좌우칸에는 판문 대신 교살창, 정자살창을 두어 채광과 환기를 고려하였다.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 방식으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대었다. 기와는 여러 문양의 것을 사용하였는데 수막새에는 박쥐문, 연화문, 봉황문, 범자문 등 7가지를, 암막새에는 인동당초문, 용문 등을 사용하였다. 망와에는 봉황문이 그려져 있다. 대성전에 사용한 문양전 막새기와는 이 건물의 격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마루도 궁궐 건물과 비슷한 양식으로 처리하였다. 단청은 대들보 등 주요 부재의 끝에 중점적으로 그려진 모로단청을 하였다. 특히 기둥의 하부에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장식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대성전은 1,411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1,413년에 재건되었고 여러 차례 중건 또는 중수되었는데 대성전의 공포구성, 대들보 치목기법, 배흘림기둥 등에서 시기적으로 조선 초기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으로 판단하면 현재의 형식은 부사 이인충이 중수한 성종 년간[1485-1488]의 건물로 추정된다.
향교의 제향공간으로는 대성전 외에 동무와 서무를 들 수 있다. 동·서무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방형 평면 건물로 실내에는 우리나라 18현과 중국의 97현의 위패를 모셔 놓았는데, 동무에는 홍유후 설총을 비롯한 58위를, 서무에는 문창후 최치원을 비롯한 57위를 봉안하고 있다. 동·서무의 건물은 대성전의 기단 아랫면과 같은 높이에 자연석 주초석 위에 건립하였다. 기둥은 원형 기둥이며 배흘림 흔적이 남아있고, 기둥 위에는 대성전이 포를 놓은 데 비해 익공을 놓았다. 서무의 익공이 동무 보다 약간 간략한 모습이다.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하였고 내부에는 'ㄷ'자형의 단을 만들고 성현의 위패를 모셨다. 천정은 연등천장 방식이다. 지붕은 맞배지붕 3량집이다. 단청은 녹칠과 주칠만 사용한 가칠단청이며 기둥 하부는 대성전과 같이 흰색과 검은색 칠을 하였다. 익공의 수업으로 보아 조선 후기 순조 7년(1807) 중수 시의 건물로 보인다.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이 만나는 축대 위에 있는 것이 정면 9칸, 측면 1칸의 전랑(殿廊)이다. 전랑은 가운데 칸과 좌우의 협칸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전랑은 원형 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대성전, 동·서무에 비해 높이가 훨씬 낮으며 그 상부에 주두 없이 바로 도리가 얹혀 있다. 기둥과 기둥은 창방으로 연결하였는데 강학공간 쪽에 회벽을 만들었고 대성전 쪽으로 개방하였다.
전랑의 지붕가구는 3량집이며 맞배지붕 형식이다. 가운데 칸의 지붕은 좌우보다 높이가 높은 솟을대문 형식이고 상부에는 홍살을 설치하였다. 이를 포함하여 3개의 문은 모두 판문이며 태극무늬로 장식하였다. 단청은 가칠단청이고 기둥 아래는 역시 흰색과 검은색으로 마감하였다. 전랑은 1493년 전랑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5세기 초반 향교를 중수할 때 이미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경종 원년(1721) 훼손이 심해 헐어내고 다시 지었는데 당시의 월랑은 12칸이었다고 한다. 현재 규모가 9칸으로 1721년과 다르며 대성전 등 제향영역의 다른 건물들과 그 수법을 보아 철종 13년(1862)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릉 향교의 강학영역에서 대표적인 것이 명륜당(明倫堂)이다. 명륜당은 정면 11칸 측면 2칸의 세로로 길쭉한 평면 건물로 그 규모면에서 향교의 일반적인 규모와 차이가 난다. 명륜당의 규모에 대하여 인조 대[1623]의 기록인 「향교중수기」에는 44칸 누각형식의 건물이라고 되어 있다. 이때부터 현재와 같은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의 간성향교와 같은 누각형식의 건물로, 전통 건축에서 흔하지 않은 유형이다. 건물 뒤로는 툇마루가 만들어져, 계단을 통해 출입하는 일반적 누각형식의 진입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현재 명륜당 출입은 동재 쪽으로 연결된 마루를 통해서 하고 있다. 동쪽 퇴칸 1칸 반은 누방(樓房)을 두어 온돌시설을 하였다. 누방은 1897년 중수 기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 경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의 벽체는 회벽으로 처리하였고 전후면 매 칸에 4짝의 세살창을 달았다.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지붕 가구는 5량집이며,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판자를 대었고, 주칠과 녹칠로 간략한 긋기단청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은 창건 이래 많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데, 숙종 22년(1696)에 전보다 크게 보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13년과 1869년 중수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중수한 건물로 보인다.
제향 공간에 동서무가 있다면 강학 공간에 동서재가 있다. 동·서재(東·西齋)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방형 평면 건물이다. 기단은 막돌에 가까운 다듬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건립하였다. 초석은 자연석으로 하였고 기둥은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벽체는 이전까지 회벽, 판자벽이었던 것을 1992년에 수리공사를 하면서 전통적인 회벽으로 처리하였다. 이 때 유리창이었던 창을 세살창으로 바꾸어서, 가운데에는 2짝의 세살창, 다른 칸에는 4짝의 세살창을 설치하였다.
향교의 동·서재는 일반적으로 숙식을 위한 온돌방과 툇마루가 만들어진 유형이 일반적이지만 강릉 향교에서는 툇마루가 생략된 형태이고 지금은 온돌이 아닌 마루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부속건물의 성격에 맞게 만들었다. 동재는 1962년 중건하였는데 당시까지의 건물형태를 참고하여 새로 지은 것이며 서재는 고종 6년(1869) 서재를 중수할 당시의 건물로 추정된다.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유생들을 교육시킨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 성격이 같다, 그러나 관학이 아닌 사학이라는 점과, 중국 선현보다는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했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는 다르다.
대부분 서원의 공간 구조는 향교와 비슷했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건물 배치는 유생들의 교육 및 기거와 관련된 공간이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공간보다 앞에 위치했다. 즉, 서원 건물 배치의 전형은 전교당, 홍교당 등으로 불리는 강당을 중심에 두고, 그 양옆에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보고, 강당 뒤에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우(祠宇)가 배치되어 있는 형식이다.
강릉 지역의 서원건축으로는 오봉 서원과 송담 서원 두 곳이 있다.
오봉 서원(五峯書院)은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구산] 58번지에 위치하며 1556년(명종11)에 선현에 대한 존숭과 인재양성, 사회교화 등을 목적으로 칠봉 함헌과 현감 최운우, 도백 윤인서, 부사 홍춘년 등이 상의하여 건설하였고 강릉부사 함헌이 중국에 갔다가 모셔온 공자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학당을 건립하여 생도를 교육하였다.
처음에는 공자의 진영만 봉안하였다가 1662년(현종3)에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1693년(숙종19)에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675년(숙종1)에 본사당 서쪽 담장 밖에 별도로 사당을 건립하고 칠봉 함헌 선생을 봉안하였는데 이것은 함헌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오도자가 그린 공자의 진영을 구해 와서 오봉 서원을 건립하는 데에 기여한 공을 치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봉 서원의 옛 건물은 본사당 6칸, 사당문 3칸, 강당 10칸, 전랑과 신문 5칸, 좌우재 6칸, 풍영루 10칸, 서고1칸, 대문 2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공부하는 생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수학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송담 서원의 강당이 10칸이었고 생도가 30명이었던 것을 보면 오봉 서원도 비슷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봉 서원은 사액서원은 아니었으나 공자의 진영을 봉안한 강원 지역 유일의 서원이었으므로 1681년(숙종7)에 토지 3결과 20명의 노비를 하사받아 사액서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806년(순조6)에는 이만수가 글을 짓고 조윤대가 비문을 쓴 오봉 서원묘정비를 세웠고 1856년(철종7)에는 조두순이 찬하고 이종우가 쓴 묘정비를 세웠는데 1868년(고종5)에 전국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이 때 공자의 진영은 향교로 옮겼고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은 연천의 임창서원으로 옮겼다. 이 후 오봉 서원의 재산도 강릉 향교로 이속되었다.
1902년(고종39) '충현을 제사하지 아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한 고종의 뜻에 따라서 철폐된 오봉 서원의 유지에 사림들이 단을 설치하고 음력 9월 상정(上丁)에 다례를 행하였다. 그러나 1905년 단이 홍수로 파괴되었고 묘정비도 파괴되었다. 1916년에 석단과 담장을 다시 짓고 묘정비를 중건하였다.
1914년에는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집성사[본사당]를 중건했으며 1928년에는 집성사 우측에 전면 1칸 측면 2칸의 칠봉사를 중건하였다. 그리고 좌측 담장 밖에 강당도 건립하였다. 현재 오봉 서원은 집성사, 칠봉사, 강당, 묘정비, 기적비 등이 있고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에 있는 송담 서원(松潭書院) 역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인재 양성, 사회 교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구정면 학산리 왕현에 석천서원이란 이름으로 건립하였다가, 1624년 9월 강원감사 윤안성과 강릉부사 강유 그리고 이곳 향토 사람인 공조참의 김몽호와 이상필 등 지역인 30여명과 상의하여 6년간의 공사 끝에 1630년에 완공했다. 같은 해 율곡 이이 선생을 봉안하였다. 1652년(효종3) 3월 강원감사 김익희와 강릉부사 이만영이 상의하여 현재의 위치인 언별리로 이건하고 그 명칭을 변경하여 송담 서원이라 하고 그 해 8월 17일에 이안제(移安祭)를 지냈다.
1659년(효종10) 12월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다음해인 1660년 9월 22일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때 국가로부터 토지 3결과 노비 22명이 내려졌다.
1726년(영조2)에 정호(鄭昊)가 찬하고 민진원이 쓴 묘정비를 건립하였다. 이 당시 서원건물은 사당이 6칸 월랑 7칸, 동·서재가 각각 3칸, 강당이 10칸이며 광제루가 3칸, 서고가 3칸이었고 서원생도는 30명이었다. 1804년 8월 화재로 각 건물이 전소되고 사당만 남았었다. 그 후 박철희가 많은 유생들과 판서 김달순에게 재가를 받아 본향뿐만 아니라 각 고을의 원조를 받아 강당, 장경각, 광제루 등을 다시 건립하였다.
송담 서원은 1871년(고종8) 5월 13일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이 후 도사(都事) 권학수가 신의계(信義契)를 조직하여 다례를 지내다가 1905년(고종40) 송담 서원 터에 묘우 1칸을 세우고 송담재(松潭齋)라 하고 음력 2월 중정(中丁)에 다례를 올렸다.
1967년 향중의 사림들이 당시 구정면 언별리 송담 서원 복구기성회를 조직하였고 1969년 유사 권태억과 김동욱이 회의를 소집하여 각 종중에서 45만 원을 모금하였고 특별성금 백만 원을 받아 1971년 묘우 6칸을 건립하였다. 1975년 직실을 지었으며 같은 해 강원도의 지원으로 담장과 정문 3칸을 신축하였다. 1976년 강원도와 명주군이 지원하고 사림들이 모금하여 동재 6칸을 신축하였고, 1978년 도비와 군비로 서재와 삼문을 신축하였다.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송담 서원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송담사를 비롯하여 동재 6칸, 서재 6칸, 삼문, 묘정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 건축의 핵심을 보여주는 민가 건축-
강릉 지역의 민가 건축을 보여주는 전통가옥들은 대개 ‘ㅁ’자형의 평면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은 따뜻한 해양성 기후 조건을 보이지만 강수량이 많고 바람이 많아서, 양반가옥의 일반적 구조는 ㅁ자형이다. 민가 건축으로는 지정 문화재로 관리되는 가옥이 20여 동이 있다. 이 가운데에는 일설에 조선 후기 홍국영의 은거지로 전하는 노암동 김윤기가옥, 허균과 허난설헌의 탄생과 관련된 곳이라 전하는 초당동 이광로가옥 등 선조들의 삶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가옥들이 많이 있다.
강릉 시내 임당동에는 옛 서민의 가옥으로 알려진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80호 오규환 가옥이 이색적인 초가지붕 모습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가장 오랜 민가 건축으로는 강릉 지역의 부호 또는 사대부 가옥의 별당 건물인 오죽헌이 있으며, 그 외에 임경당과 선교장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전통가옥들이 대부분은 조선말부터 근대에 건축된 것들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나라 화폐에도 등장해 있는 오죽헌을 먼저 살펴보자. 오죽헌(烏竹軒)은 조선초기 병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낸 최응현의 옛 집으로 그의 사위 신명화가 살았다. 신명화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맏딸은 권화와 결혼했고 둘째 딸 사임당 신씨는 이원수와 결혼했다. 오죽헌은 권화의 집안에서 대대로 관리해왔는데, 조선전기 사대부가의 별당 건물로서 당시 건축양식 “이익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축물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오죽헌에는 대학자 율곡 이이 선생의 어머니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은 방인 몽룡실이 있다. 이곳에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죽헌은 1975년 성역화사업을 거쳐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 어제각, 사랑채, 기념관 등의 모습을 갖추었고 근래에 안채가 복원되었다. 문성사에서는 1962년부터 매년 '대현 율곡 이이 선생제'가 봉행된다.
강릉의 유명한 건축물로 선교장(船橋莊)을 빼놓을 수 없다. 선교장은 조선 중기 이후 전형적인 사대부의 저택으로 안채, 사랑채(열화당(悅話堂)), 별당(동별당(東別堂)과 서별당(西別堂)), 정각(활래정(活來亭)), 행랑채 등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67년 4월 18일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선교장의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여름이면 연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연못과 활래정을 만난다. 활래정은 차(茶)방이 딸린 정자 건물로 이 가문의 활달한 기풍을 보여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내·외담이 남여가 유별했던 전통적인 시대를 말해준다. 그 너머로 이 가문 종부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안채와 별당 건물들이 시원하게 들어차 있다. 안채 뒤쪽 산기슭에 사당이 담장과 함께 아름답다.
출판사 열화당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사랑채 열화당은, 전국의 문객과 교유했던 이 댁의 바깥주인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던 대외적 공간이다. 그 앞으로 중사랑과 행랑이 길게 이어져 있다. 선교장 본채 주변으로는 이 가문과 관련 있던 민가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선교장은 가옥을 둘러싼 담장과 구성이 아름다운 건축·조형의 역사적 공간으로 남아 있다. 선교장은 최근 관동대학교와 함께 한옥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전통문화연구원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임경당(臨鏡堂)은 강릉시 성산면 소목길 18-26[금산리 445-1번지]에 위치하는 조선중기의 사대부가의 별당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1974년 9월 9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강릉 12향현의 한 사람인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의 아버지 김광헌(金光軒)이 건립한 것이다. 주변에 널리 소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당호(堂號)인 임경당(臨鏡堂)은 김열의 아호(雅號)를 그대로 딴 것이며 주변에 소나무를 잘 가꾼 것을 보고 김열과 교유했던 율곡 이이가 「호송설(護松說)」을 지어주었다.
이 가옥은 뒤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이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서향으로 건립되었는데 앞의 네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을 보이고 있으며 1칸 후퇴하여 우측 1칸은 온돌방으로 좌측 2칸은 대청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면 1칸은 뒤로 후퇴하여 모두 툇마루를 놓은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건물 안에는 율곡의 「호송설」 및 김열의 「송어시(松魚詩)」를 비롯한 많은 시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경당 근처 성산면 갈매간길 8-3[금산리 620번지]에는 임경당보다 조금 작은 가옥으로 대청 1칸, 방 1칸으로 구성된 우물천장의 상임경당(上臨鏡堂)이 있는데, 1976년 6월 17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임경당보다는 높은 산세를 이용해서 자리를 잡았다. 건물 내에는 율곡의 「호송설」이 새겨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유당(酉堂) 김노경(金魯卿)이 글씨를 쓴 ‘임경당(臨鏡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강릉 지역의 전통가옥 가운데에는 4건의 유형 문화재와 14건의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건축물들이 있다. 이들 전통가옥은 대체로 조선 후기의 사대부 집안의 집인데, 건물의 평면형식은 ㅁ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고 안채는 겹집으로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방을 배치하였다. 또한 내·외담이나 그 흔적이 뚜렷하며 ㅁ자형 건물의 앞부분은 사랑채이고 뒤는 안채이고 그 사이에 광이 배치되어 있다.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심상진 가옥[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9호], 최대석 가옥[제81호], 정의윤 가옥[제93호], 조수환 가옥[제96호]이고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가옥은 조실환 가옥[문화재자료 제54호], 최근배 가옥[제55호], 김덕래 가옥[제56호], 김윤기 가옥[죽헌동 소재 제57호, 노암동 소재 제58호], 이광로 가옥[제59호], 남진용 가옥[제60호], 최상순 가옥[제61호], 조옥현 가옥[제62호], 최선평 가옥[제81호], 박치규 가옥[제82호], 조철현 가옥[제87호], 박창규 가옥[제91호], 함대식 가옥[제92호]이다.
이같은 유형의 가옥들은 연곡, 사천, 강동면, 죽헌동 등에 여러 채가 남아있다.
사대부가옥이 아닌 서민가옥으로 강릉 지역에 남아 있는 건축물은 강릉시 임당동 28번지의 오규환 가옥이 유일하다. 오규환 가옥(吳奎煥家屋)은 목조 초가이며, 안쏠림이 현저하여 일명 ‘오금집’이라 불린다. 1985년 1월 17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강릉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초가로서 오래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집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겹집이며 전면에 방과 마루방 1칸씩을 배치하고 뒤로 방 2칸을 마련한 후 옆에 부엌을 만들었으며 앞에 툇마루를 두어 연결통로로 활용하고 있다. 기둥은 거칠게 다듬은 원주로 중앙은 수직으로 세웠으나 네 귀의 기둥은 안쪽으로 쏠리게 세운 오금형식을 지니고 있다. 벽체는 흙벽이고 목재의 가공은 매우 거칠며 형식이나 건립 연대 등이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경치를 더욱 빛내는 누정 건축과 사찰 건축-
강릉은 산천이 수려한 곳이다. 때문에 호연지기를 키우려던 옛 선인들이 늘 찾던 곳이기도 하다. 자연이 아름다운 호수와 강변에는 어김없이 누정이 있어 풍류로 서로 사귀었던 옛 선인들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수많은 전설과 사연이 담겨 있는 관동팔경의 경포대[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6호]는 고려 시대에 처음 창건된 후 여러 차례 개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경관이 뛰어났으며 현재의 모습은 조선 후기 고종 대에 중수된 모습이다.
이 외에도 경포대 인근에는 현재에도 보물 제183호 해운정을 비롯하여 오성정[유형 문화재 제47호], 방해정[유형 문화재 제50호], 호해정[유형 문화재 제62호], 금란정[문화재자료 제5호] 등 약 10동의 누정이 있어 자연을 벗 삼아 노닐던 선비들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이들 누정은 대부분 지역의 유력한 문중이나 계모임을 통해 건립되어 지역의 결속을 다지는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강릉은 예부터 유력한 문중을 중심으로 각 가문이 결집하는 전통을 이루어왔다. 그런 측면에서 각 가문의 종가에는 사당이 있었으며 각 종중별로 향현사, 화부산사, 황산사, 경양사, 회암영당, 용지기념각, 보진당, 청간사 등의 관련 사당 건축 유적지에서 현재에도 매년 제례를 올린다. 같은 맥락에서 각 가문마다 유교적 이념을 중시했기 때문에, 충효열을 모신 정려각이 강릉 지역에 36곳이나 있다. 이런 전통 건축물들은 규모가 작은 별도의 건축물이기는 해도 주변의 자연경관 또는 본채 건물들과 어우러져 또 다른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불교 건축에 있어서도 강릉 지역에는 신라말 굴산사, 보현사, 한송사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풍부한 건축 문화 유산이 있었으나 전화(戰禍)로 소실되었다. 근대에 다시 복원되어 옛 풍광을 보여준다. 현재 남아있는 전통 유적으로는 굴산사지의 당간 지주, 부도, 보현사의 부도와 비 등 석조 문화재가 있다. 목조 문화재로는 보현사의 대웅전이 유일하며 그 외의 것은 대체로 근래에 복원된 것들이다.
보현사 대웅전은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보광리 산544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조선 후기 양식의 법당 건물이다. 목조 팔작지붕 건축물로 1984년 6월 2일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보현사는 신라 진덕여왕 4년(650)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로 후에 낭원대사(朗圓大師)가 중창하고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의 건물로,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다포(多包)집이다. 건물 전면에 석탑재와 돌사자 등 화강암 석재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