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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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習 |
영어음역 | Kim Siseup |
이칭/별칭 | 매월당,설잠(雪岑),청간(淸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도식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무반 계통의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이고, 어머니는 선사장씨(仙槎張氏)이다.
[생애]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생지지질(生知之質)이 있었다 할 만큼 천품이 영민하였다. 3세 때 이미 한시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무우뇌성하처동 황운편편사방분))”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5세 때까지 이미 『정속(正俗)』·『유학자설(幼學字說)』·『소학(小學)』·『중용(中庸)』·『대학(大學)』을 배웠다.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 뒤 13세까지 전 성균관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서경(書經)』을 배웠고, 또 이웃집에 살던 윤상(尹祥)에게서 『주역(周易)』과 『예기(禮記)』를 배웠다. 그리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 알았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한 후 과거 준비로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수학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잡은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29세 되던 1465년(세조 11) 경주 남산에 위치한 금오산실(金鰲山室)에서 성리학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환속하였다. 다시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고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살았다.
1485년(성종 16) 51세 때 폐비 논의가 훈구대신들에 의해 제기되자 다시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에 올랐다. 주로 관동 지방에 은둔, 전국을 방랑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학문과 사상]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儒佛) 관계의 논문들을 남겼다.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는 평을 들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시습의 사상은 유교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불교적인 요소가 혼효된 듯이 보인다.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불교에 관계된 논문들을 다수 남겼다. 부처의 자비정신과 마찬가지로 군주(君主)가 그 백성을 사랑하여 부도덕한 정치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불교의 천태종에 대해서는 선적(禪的)인 요소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김시습은 「신귀설(神鬼說)」·「태극설(太極說)」·「천형(天形)」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에 나타나는 신비적 성격을 배격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현실에 근거하여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교적 사고방식의 발로이다.
한편 김시습의 성리사상은 유기론(唯氣論)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귀신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철학적으로 인식하여, 기(氣)의 이합집산에 따른 변화물로 보았다.
[저술]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금오신화』, 『매월당집』이 있다. 17세기 초의 문인 기자헌(奇自獻)은 노수신이 배접한 김시습의 친필 유고를 1604년(선조 37)에 얻어 보고, 다른 유고를 더 모아 김시습의 ‘기행’ 시를 중심으로 『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을 엮었다.
[작품]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시습의 작품으로 역대 시선집에 뽑힌 것은 20여 수에 이르고 있다. 대표작으로 「산행즉사(山行卽事)」·「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도중(途中)」·「등루(登樓)」·「소양정(昭陽亭)」·「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고목(古木)」·「사청사우(乍晴乍雨)」·「독목교(獨木橋)」·「무제(無題)」·「유객(有客)」 등이 있다. 우리나라 역대 시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등 5편이 전부이며 이 작품들은 김시습의 사상을 검증하는 좋은 재료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를 제외한 것들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담이다.
[묘소]
죽을 때 화장(火葬)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무량사 옆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는데, 3년 후에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열어 보니 모습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부도에 안치하였다.
[상훈과 추모]
한산이씨 명문가의 문인이었던 이자(李耔)는 김시습이 죽은 후에 그 시문을 처음으로 모았다. 선조 연간의 문단에서 대가로 손꼽혔던 노수신(盧守愼)은 김시습의 친필 시 17수를 모아 첩(帖)으로 묶어 후세에 전했다. 훗날 허목(許穆)은 그의 시첩을 보고 발문을 남겼다. 김시습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번지에 있는 창절사(彰節祠)와,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190번지에 있는 청일사(淸逸祠)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