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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064
한자 聖堂
영어음역 seongdang
영어의미역 Catholic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남현증보:전제훈

[정의]

천주교의 교회 의식이 행하여지는 건물.

[강릉지방 천주교 전래과정]

한국천주교는 정조 8년(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그람몽(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권일신에게 세례를 준 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유학 그 중에서도 주자학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전반에 뿌리를 내린 시기였기 때문에 유학과는 근본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계시종교인 기독교가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크나큰 난관이 있었고, 끝내는 처절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주자학의 기본 윤리는 오륜(五倫)인데, 특히 천주교의 경우는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에 근본적으로 저촉되어 당시의 유학이념에 의해 국가 대계를 세우고 있었던 조정 정치가들은 기독교를 소위 맹자의 무부무군(無父無君), 즉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모욕하고 무시하여 가족질서를 파괴하고, 임금에게 바쳐야할 충성과 의리를 무시함으로 국가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무리라 칭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정조 9년(1785) 을사년에 일어난 박해를 시작으로 하여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로 이어졌다.

이는 기독교 신자 뒤에 보호세력으로 있었던 당시 강대국들의 이해득실과 주자학에 대한 신봉이 돈독했던 조선의 노론(老論) 정치가들의 외국에 대한 기본방침이 충돌하여 정치적 문제로 비약됨으로써 가혹한 박해가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이승훈, 권철신, 정약용, 황사영 등 조선 천주교 선교의 선구자들이 순교함에 이르러 천주교도들은 가족 단위로 뿔뿔이 난을 피해 경상도 또는 강원도 산간벽지로 피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강원도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실태는 조직적이라기보다는 가족친지 단위로 그것도 타지방에서 남의 눈을 피해 산간벽지에 들어와 산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역사적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달레(Ch.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 가운데 신유박해 직후 신태보라는 사람이 교인 다섯 가구 4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에서 8일이나 걸려 강원도 산골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또한 충청도 서산 사람 김강이는 전라도 고산에서 주문모 신부를 알게 된 후, 경상도 머루산으로 피해 가 교인촌을 세웠다가 후일 강원도 울진에 정착했으나 1815년 11월 5일 옥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된 계기는 역시 고종 3년(1866) 대원군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경향잡지』에 “영동교우로 말하면 5~60년 전 병인군란 풍파시에 전라, 충청, 경기도 교우들이 피난차로 영동에 넘어와서 근근득생하여 사는 교우들이오”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과 함께 『치명일기』 832 심스테파노조에 “본데 강릉 굴아우에 살더니 무진년(1868) 5월에 경포(京捕)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바로와 함께 갓치였다가 치명하니 나흔 이십구셰된 줄은 아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라 하여 강릉 출신 순교자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강릉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동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오게 되는 경로를 살펴보면, 이를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천주교인 학자들이 칩거하고 있었던 강원도와 접경지역인 남한강 유역의 광주 양근 지역과 충청도 제천 지방 그리고 강원도 횡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양, 횡성, 제천에 살고 있는 천주교 신도들의 정착 내력을 조사한 기록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현재 양양군 양양읍 차마리의 이종화[양양성당 신자]의 증언에 의하면 전주이씨인 그의 선대가 병인박해 당시 경기도 양근에서 북한강을 거슬러와 미시령과 진부령 중간에 있는 샛령을 넘어 양양에 정착했다고 한다.

둘째는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천리에 위치한 풍수원이라는 천주교인촌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신태보[베드로]가 40여명의 교인과 함께 경기도 용인을 거쳐 이곳에 정착했고, 병인박해와 신미교난(1871)을 피해 집단이주해왔다. 그들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현재 양양의 명지리 현북공소 회장인 이계용씨 역시 그의 5대조가 평창군 도암면 피대골[현 유천 3리]로 피난 갔다가 그 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공소를 거쳐 명지리 공소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셋째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배론이다. 신해박해(1791) 당시 난을 피해 집단 이주해 온 교인들의 마을로 이들도 역시 농사와 옹기를 구워 생활하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이곳 옹기촌에 숨어서 조선 교회의 박해 현황과 왜곡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내용을 적은 백서(帛書)를 작성했던 곳이다.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영동 지방 천주교 전파 경로를 정리하면, 남한강 유역에서는 광주 또는 양근-한강-샛령-영동 북부가 될 것이고, 풍수원에서는 횡성-평창-강릉이 될 것이고, 배론에서는 제천-영월-평창-강릉이 될 것이나, 앞으로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영동지역 천주교 공소(집단부락)의 설치]

영동 지방의 초기 천주교 집단부락은 기존의 주요 역로(驛路)와 간선도로를 따라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동 지역에 이르는 역로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역로조를 볼 것 같으면, 경성-원주-운교-방림-대화-진부-횡계-대관령-구산-강릉으로 뻗어 있고, 해안 간선도로는 경주에서 양양까지는 2등, 강릉에서 경성까지도 역시 2등 도로였다. 천주교인 집단부락은 횡성 또는 제천에서 평창-강릉-양양-고성-원산에서 보듯이 역로와 간선도로가 인접하여 형성되는데, 이는 난을 피하여 이동하고 또한 신자끼리 정보교환을 하는데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생계수단인 옹기를 굽기 위해서 필요한 양질의 흙, 물, 땔감 등이 영동 지역에 풍부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사료된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지는 것은 『증수임영지』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의 천주교 공소 현판에 ‘1887년 건립’이라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천주교인들이 강릉에 이주하여 온 것은 이보다는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금광리 공소의 회장으로 있는 기중철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증조모가 증조부와 교인들과 함께 경주에서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 왔다고 하며, 이영녀 씨도 그의 시아버지인 조중서 씨가 소년시절에 경기도 여주에서 피난해 왔다고 한다. 또한 현북면 명지리 공소의 김정각 씨도 그의 증조부인 김요한이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금광리에 정착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제8대 조선교구장과 1911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 교구장을 지낸 바 있는 뮈텔(Gustave Charles Mutel)[1854~1933] 주교가 쓴 『뮈텔주교일기』에 의하면, 190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 강원도 교우들을 심방한 기록이 적혀 있는데 당시 횡성의 풍수원에서 영동 지역에 이르는 공소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풍수원-금두[갑천면]-도새울[공근면]-창봉[공근면]-황달모[둔내면]-물푸레[평창면]-산너미[미탄면]-대화[대화면]-고인돌[진부면]-대관령-금광[강릉시 구정면]-명지골[양양군 현북면]-장등골[양양면 서면]-쉬일[양양군 양양읍]-정바위[양양군 강현면]-싸리재[속초시 상도문리]-회약골[고성군 토성면]

따라서 영동 지역 최초의 공소는 원산교구 소속 구정면 금광리 공소라고 알려졌는데, 이 『뮈텔주교일기』를 자세히 분석한 최근의 연구결과 영동 지역의 최초의 공소는 지금 없어진 구정면 여찬리의 삼정평 공소라는 설이 있다. 『뮈텔주교일기』의 1900년 11월23일자에 “구산에서 우리는 큰 길을 벗어나 삼정평 옛 공소로 가기 위해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삼정평에는 최근 두 명의 교우가 다시 살러 왔다”라고 적혀 있다. 삼정평 공소는 폐쇄되어 현재는 없으나, 강릉에서 대관령을 넘어 영서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구산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삼정평 공소를 현존 금광리 공소보다 앞선 것으로 보는 견해는 더 자세한 고증이 있어야 할 것이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내곡동에 사는 김복남씨[80세]의 증언에 의하여 삼정평 돌고개 밑에 천주교인들의 옹기마을이 존재했음도 확인되고 있다.

영동 지방 각 공소의 신도수는 『뮈텔주교일기』의 1900년 11월 24~12월 6일자에 의하면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공소와 속초시 상도문리의 싸리재 공소는 단독 공소 건물을 갖추고 신도수도 약 100여 명에 이르렀으나, 양양의 명지골 공소는 약 30명, 장승골 공소는 약 20명, 쉬일 공소는 약 10명, 정바위 공소는 약 30명 정도였다. 공소가 처음 만들어지던 초창기에 영동 지방의 신도수는 300명 선을 넘지 못했지만 『치명일기』에 의하면 1920년 초에는 900명이나 되고 있다.

[강릉지방 성당의 변천 및 현황]

원산 본당에 소속되었던 강릉 지방에 천주교 본당이 세워진 것은 1921년 7월이었다. 이 방지거[철연(喆淵)] 신부에 의해서 구정면 금광리에 세워진 영동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영동교회는 1923년 6월 경성교구의 지시에 의해 신리면 교향리 133번지에 10칸 상당의 가옥을 신축하여 이전하는데, 11월이 되어 본당으로 발족되었다.

1926년 2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김인상[야고보] 신부는 1931년 6월, 당시 강릉읍 임정(林町)에 12칸짜리 가옥을 매입하여 본당 건물로 쓰다가 1934년 임당동으로 이전하였다. 1939년의 신자 총수는 『천주교임당교회약사』에 의하면 699명이었다고 한다.

제3대 김학용[시몬] 본당 신부 재임시 임당동성당은 춘천교구로 편입하게 되는데, 이는 1939년 4월 25일 강원도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감목구가 되었고, 1940년 구인란[도마] 신부가 춘천 감목대리가 된 것과 관계가 있다.

1946년 6월에 임당동성당 소속 건물 약 60여 평을 할애하여 불우한 청소년을 위한 야간중등과정인 성심공민학교를 만들었다. 이 학교는 성심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그 후 10여 년간 계속되어 졸업생을 420여 명이나 배출하였으나, 당국의 인가를 얻지 못해 1957년 2월 자진 폐교하였다.

임당동성당은 1967년 3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도움으로 소화유치원을 개원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임영로 148[임당동 159번지] 소재의 성콜롬바노 성전은 1951년 부지를 매입하고 1954년 착공하여 1955년 11월 준공된 것으로 1950년대 성당건축의 전형으로써 중요시 되고 있다.

1959년 12월 임당동성당 레지오 마리아가 발족되고, 1963년 9월에는 현재의 사제관이 준공되었으며, 1964년 호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에 의해 갈바리의원이 문을 열어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를 시작하였다. 1973년 3월에는 강릉신용협동조합이 교인들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1974년 11월 옥천동성당이 분리되었는데, 이 본당은 춘천교구의 박토마 주교에 의해서 1973년 4월 5일 용지로 131[옥천동 324의 1번지]에 착공되어 19개월 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옥천동성당은 성가정주보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1987년 10월에는 노암동 355번지의 노암동성당[노암길42번길 8-9]이 분리되어 나가 강릉 지역의 천주교 선교활동의 활성화가 눈에 띄게 촉진되었다.

1996년 3월1일 연당길 49[초당동 137]의 초당성당이 분리되었는데, 나자렛 성요섭성당으로 지정되었다.

2004년 2월 12일 교동광장로 171-23[교동 1087]에 솔올성당이 세워졌다. 교동택지가 개발되면서 많은 인구의 유입에 따라 분리되었는데, 성 요한 비안네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2008년 2월 15일 입암로91번길 18[입암동 475]에 입암성당이 세워졌으며, 성모 성심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강릉시의 천주교 본당 수는 8개이다.

주문진과 묵호 등지의 공소가 소속되어 있었으나, 대화 공소가 1924년부터 1933년까지 강릉 본당 내에 대화, 진부, 횡계를 비롯하여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분리되었다. 1921년에 설립된 주문진 공소는 1933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묵호 공소는 1949년에 묵호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주문진 성당행정 공소삼산 공소가 있고, 노암동성당에 금광리 공소가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2.12 인명 오기 수정 [강릉지방 천주교 전래과정] 이승만->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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