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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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현대 |
집필자 | 김영아 |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공자의 가르침과 학문을 중심 삼아 활동하는 종교.
[개설]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종교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평화로운 사회를 목표로 하였다.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는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고구려에서는 유교를 가르치는 인재양성을 위해 최초의 교육기관인 태학을 건립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이 세워졌으며, 과거제도가 도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정치와 사회질서를 유지하려 했으며, 한양에 성균관을 설립하였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영토 확장에 따라 고구려는 약 396년부터 449년 사이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고, 오늘날의 가평 지역이 고구려의 근평군으로 지칭되면서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가평 지역의 유교는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한 까닭에 일찍부터 유교를 수용하여, 문무겸비를 중시하던 기질과 잘 조화시켜 국가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후 11~12세기의 고려에 전국적인 단위에서 향교가 건립되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주목부군현에 각 1개교씩 향교를 세우게 하였다. 가평 지역에서도 1398년(태조 7)에 가평향교가 창건하여 560여 년에 걸쳐 운영되었다.
[향교]
가평 지역에 향교가 설립된 것은 조선 초기이며, 향교와 서원이 설립되어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다. 향교는 오늘날의 지방에 있는 학교와 같은 곳이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목민관의 책임하에 관리 운영된 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을 가르쳐 향토사회를 교화하고, 정무체제에 필요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가평에 처음 설립된 가평향교는 가평읍 읍내리 가평초등학교 내에 있다. 1986년 가평군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가평향교의 배향 인물로는 오성위로 공자, 맹자, 자사, 안자, 증자가 있으며, 동서 종향 인물로 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 등이 있다. 가평향교는 명륜학당을 개설하여 한문 강좌를 열고 있으며, 방학을 이용하여 중·고등학생들에게 충효, 예절, 향토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명륜당은 전통 결혼식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서원]
가평 지역에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7세기이며, 미원서원과 잠곡서원이 향교와 함께 향토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미원서원은 1661년(현종 2)에 지방유림이 조광조와 김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가평군 설악면 경현단 자리에 설립되었으며, 가평군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미원서원의 제향 인물은 조광조, 김식, 김육, 남언경, 이제신, 김창흡, 박세호, 이원충, 남도진, 이항로, 김평묵, 유종교 등이다. 잠곡서원은 1705년(숙종 31)에 창건되었으며,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현말에 있었던 서원이다. 현재 서원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광해군 때에 김육이 농사를 지으며 은둔하여 훗날 후학들이 서원을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잠곡서원’이라 명명하였다. 잠곡은 청덕동으로, 지금의 청평 안전 유원지 일대의 물에 잠긴 마을이다. 가평군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제향 인물은 김육이다.
[이상향과 은거지로서의 가평]
조선시대에 북한강 유역의 조종천, 벽계, 미원 일대는 유교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은둔지로 꼽혔다. 한양에서 뱃길로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던 벽계, 미원, 소설악은 유학자들이 고단한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는 은거지의 성격이 강하였다. 가평 지역에서 유교 지식인들이 은거할 수 있는 이상적인 마을을 조성하였던 기록으로는 판미동고사와 미원고사가 있다. ‘판미동’은 지구상 맨 끝 마을로, 이상향을 의미한다. 판미동은 신숙주의 다섯째 아들인 소안군 신준의 후손인 신석(申奭)[1650~1724]이 건설하였다. 신석은 주자의 여씨향약을 모체로, 이율곡의 해주향약을 참고하여 판미동의 특징에 맞게 규칙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현재 가평군 조종면 상판리와 하판리[현 조종면 운악리]를 포함하는 조종천 상류 지역에 위치한다고 전해지는 판미동고사는 가평의 옛 조종 고을에서 1674년부터 1760년까지 약 100년 동안 삼대를 거치면서 유교적 윤리를 기반으로 건설되어, 이상사회를 이룩했다가 18세기 후반부터 쇠퇴하게 된 사연을 담고 있다. 미원고사는 현재의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미원초등학교 일대로 추정된다. 이들 고사는 이상적인 은둔지로 주목받던 가평을 무대로 유교 지식인들이 유교의 세계관에 따라 자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위정척사 및 화서학파와 의병운동]
위정척사운동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개화의 흐름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척사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자강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무모한 개항은 곧 자체 붕괴의 위험을 초래한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화서학파는 송시열의 도와 학통을 계승한 화서 이항로의 강학 활동을 통해 그의 사상을 계승한 학자와 사상가들을 말한다. 화서학파의 중심에는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준, 김평묵, 유중교, 유인석, 최익현 등이 있다. 이들의 주 무대가 가평이었으며,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항일의병운동과 구국운동을 주도하며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섰다. 김평묵은 ‘존귀한 골짜기’라는 뜻의 대곡서당을 대곡리[현 설악면]에 세우고, 유중교는 신천리 일대에 한포정사와 한포서사 등을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특히, 유중교의 문하에서 유인석, 이직신, 이춘영, 주용규, 이필희, 서상렬, 이범직, 신지수, 안승우 등 많은 의병장이 배출되었다.
[가평 지역의 유학자]
1. 이항로(李恒老)[1792~1868]
이항로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호는 화서(華西)이다. 가평과 인접한 양근(楊根)의 벽계리에서 출생하였다. 1808년(순조 8) 한성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 학문과 후진 양성, 그리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의 학설은 주리론으로, 리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고, 양자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최익현과 김평묵, 유중교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저서로 『화서문집』이 있다.
2. 김평묵(金平默)[1819~1891]
김평묵은 가평의 대표적 유학자로 호는 중암(重庵)이며, 이항로의 제자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스승 이항로의 주리설과 척사론을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이항로를 동부승지에 임명하자, 스승과 함께 상경하였다. 그 사이 가평군 신천리에 거주하며 한포서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평묵은 유중교와 함께 『화서아언』, 『화서문집』, 『화서연보』 등을 편찬하였다.
3. 유중교(柳重敎)[1832~1893]
유중교는 김평묵과 함께 이항로의 양대 제자로 추앙받는 인물로, 호는 성재(省齋)이다. 유중교는 이항로의 명에 따라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모델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의 편수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의리론을 바탕으로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서술한 저서이다.
4. 유인석(柳麟錫)[1842~1915]
유인석은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호는 의암(毅庵)이다. 유인석은 춘천에서 태어났으나, 먼 친척에게 양자로 보내져 가평군 설악면으로 옮겨왔다. 그는 대일 항쟁을 계속하면서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융희 1) 고종의 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로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해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저서로 『소의신편』이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가평 지역의 유교 인구]
가평 지역의 유교 인구에 관한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통계청이 주관하여 1995년에 전수조사한 ‘인구 주택 총조사’가 유일하다. 통계청 조사에서 집계된 가평군의 유교 현황을 보면, 가평의 총인구 중 종교 인구는 총 23,704명[남자 11296, 여자 12408]이며, 그 중 유교 인구는 455명[남자 231, 여자 224]이었다. 이 수치는 가평군의 총인구 대비 0.9%에 해당하며, 가평 군민 가운데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인원인 23,704명에 비교할 때 1.9%에 해당한다. 한편 전국 총인구 44,553,710명 가운데 유교 인구는 210,927명으로 전국 총인구 대비 0.5%이며, 전국의 종교 인구 22,597,824명 가운데 0.9%를 차지한다. 그리고 경기도의 종교 인구는 3,903,966명이며, 유교 인구는 34,124명으로 경기도 총인구 대비 0.4%, 경기도 종교 인구 대비 0.8%이다. 이러한 수치로 볼 때 가평군 내에서 유교인의 비중은 전국과 경기도의 경우보다 약 두 배 정도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가평군이 유교 문화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점과 아직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 등의 지역적인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평군 내에서 유교 인구의 비중은 불교, 개신교, 천주교 다음으로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제사를 제외하면 종교적인 결속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또한 유고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나 사회윤리와 관련된 부분으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유교 인구는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공동체의 특성과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영향력은 유지될 것으로 예상한다.
[가평 지역의 유교 단체]
유교 단체는 1945년 성균관 비천당 광장에서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모여 유도회 총본부를 구성하였다. 이날 총회에서 헌장을 통과시켰으며, 독립운동가 김창숙이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유도회 총본부 산하에는 각 시도 본부와 270여 개의 지부가 설립되어 있다. 가평 지역의 유교 단체로는 유도회 가평지부가 1978년 결성되어 최돈철이 지부장으로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