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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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공식명칭 | Clothing Habits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 사람들의 옷과 관련된 생활 문화.
[개설]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의생활이란 옷과 관련된 생활 문화를 말한다. 의생활은 옷 자체에 대한 연구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어떻게 옷을 생산하고, 어떤 옷을 어떻게 입으며, 이런 것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생활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러한 양식 속에 내재된 생활관은 무엇인가 등을 총체적으로 다룬다. 즉, 옷의 제작, 옷의 종류와 형태, 옷의 소비와 착용 방법, 옷 착용에 있어서의 관념 등을 고려하게 된다. 옷에 대한 관념이나 착용 방식은 민족에 따라, 생활 환경에 따라, 공동체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한복과 일본의 기모노, 중국의 치파오 등은 옷의 유형이나 입는 법, 옷에 대한 관념 등에서 차이가 있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옷을 매일 바꾸어 입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때가 묻지 않는 이상 한국인들은 이렇게까지 매일 바꾸어 입지는 않는다. 또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지역에 따른 차이도 있다.
가평 주민들의 의생활은 타 지역과 두드러진 차이가 나지는 않다. 가평 지역이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하며 한국인의 일반적인 의생활을 그대로 반영해 왔기 때문이다. 문헌 자료가 부족한 현재 가평 지역의 의생활에 대한 탐구는 시기적으로는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 있는 일제강점기 이후를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1930년대까지 주로 자급자족을 하였고, 1960년대 말까지는 자가 생산과 공장제 옷감을 구입하여 옷을 지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가평 지역 의생활의 큰 변화라면 1970년대 이후 한복이 일상복에서 밀려나고 대신 그 자리를 서양식 의복이 차지하게 된 점이다. 이후 한복은 일부 노년층들의 일상복으로 유지 되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그마저 서양식 의복에 자리를 빼앗겼으며 한복은 혼례, 제례, 명절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입는 복색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최근의 양상을 보면 한복을 입는 경우는 더욱 줄어들었다. 명절이나 제례에도 양복을 많이 입으며 결혼식에도 신랑, 신부와 가까운 여성 친지들만 한복을 입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신발의 경우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짚신이 서민들의 일반적인 신이었다. 비가 올 때는 나막신을 신었고 혼례식과 같은 잔치에는 미투리를 신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무신이 나와서 한동안 고무신이 서민들의 신발 역할을 하였다. 근래에는 구두, 운동화, 샌들, 실내화, 장화 등 신의 기능에 따라 종류가 다양화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수도가 놓이기 전까지 부녀자들은 마을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였다. 세탁은 해방 전후에는 비누가 없어 잿물을 이용하였다. 이후 양잿물을 사용하다가 1970년대에 빨래비누가 유통됨에 따라 빨래비누를 사용하였다. 세탁기를 사용하면서 부터는 세재를 사용한다.
[복식의 변화]
가평 사람들의 의생활은 스스로 옷을 지어 입던 시기, 광목과 같은 공장제 원료를 이용하여 옷을 지어 입던 시기, 시장에서 사서 입는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30년대까지는 주로 자가 생산과 제작이 주류를 이루고,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자가 생산과 공장제 옷감을 구입하여 옷을 지어 입는 시기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졌고, 삼베·무명·명주를 생산하도록 하던 국가 정책이 바뀌면서 시장에서 옷을 구입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가평 지역 주민들은 오늘날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복을 자주 입지는 않지만 과거 양장[서양식 의복]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한복을 입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복에서 양장으로 일상생활의 의복 형태의 주류가 바뀐다. 그 전만 하더라도 옷감이 귀하여 직접 옷감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당시 가평의 주민들이 입었던 옷감으로는 삼베·명주·모시 등이 있다. 과거 여름철에는 삼을 심고 겨울에는 길쌈을 하여 이듬해 여름철에 삼베적삼을 만들어 입었다.
가평군 북면 제령리 주민의 경우 1960년대까지 삼베를 만들었다. 3월에 삼을 심어 가을이 되면 삼을 베어, 잎을 떼고 가마에 세워서 위를 덮은 후 찐다. 이어 삼의 껍질을 벗겨 한주먹씩 묶어 걸쳐서 말린다. 삼이 마르면 두들겨 손가락으로 껍데기를 벗겨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쪼갠다. 가는 삼을 무릎 위에 놓고 이어서 실 형태로 만들어 바구니에 담는다. 그것을 둥글게 감아서 풀을 먹여 불을 지펴 놓고 불에 쪼인다. 이렇게 한 후 겨울에 방에서 베틀로 짠다. 그렇게 만들어 둔 삼베를 이용해 여름철에 옷을 해 입었다. 제령리의 주민들은 삼이 없을 경우 마장리까지 가서 삼을 얻어다 길쌈을 했다.
한편, 가평의 주민들은 누에를 쳐서 명주를 짜 명주옷을 입기도 했다. 지금 60대 이상의 주민들만 하더라도 1960년대까지 누에를 치던 때를 기억한다. 주민들은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면에서 누에알을 받아 누에를 키우며 산뽕을 따러 다녔다. 누에는 40일만 키우면 판매할 수 있어 농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면사무소에 판매 하고 남은 누에고치로 명주를 짜서 명주옷을 지어 입었다. 그러나 명주옷은 귀하여 아무나 입고 다닐 수는 없었다.
주민들의 의생활에서 있어 큰 변화는 일상복이 한복에서 양장으로 바뀐 점도 있지만 자급자족하여 직접 지어 입다가 시장에서 구입해서 입는 것으로 바뀐 점도 주목된다.
가평군 북면 도대리 주민에 의하면, 1950년대만 하더라도 광목으로 직접 한복을 지어 입었다고 한다. 당시 옷감에 물을 들이는 물감을 시장에서 팔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가정에서 물을 들여 입기도 했다. 여자들이나 아이 옷은 분홍이나 노란 물을 들여 입었고, 어른 옷은 흰색이나 검정으로 지어 입었다. 버선이나 속바지도 광목으로 만들었다. 당시 한복 입을 때는 버선을 신고 속바지를 입은 후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이후 일 바지가 일반화 되면서 한복 저고리에 치마 대신 일 바지를 입었다. 일 바지는 몸빼라고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말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가 되면 양장을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령리의 경우 새마을 운동 이후에는 현리장에서 기성복을 사 입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공장에서 생산된 옷을 입는데 남자들은 노동복으로 운동복을 비롯하여 작업복이나 헌옷 등을 선호하고, 여자들은 일 바지 계통의 옷이나 일하기 편한 헌옷을 선호한다. 외출할 때는 정장 차림을 하는데, 남자들은 양복, 여자들은 양장을 한다. 가평읍 복장리의 사례를 보면 가족의 옷은 주로 주부가 많이 구입을 한다. 할머니들은 나이가 많아 직접 사는 경우가 드물다. 마을 부녀회에서는 2004년 중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공동으로 잠바를 서울 상계동 백화점에서 구입하였다. 199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농부들은 일을 할 때 헌옷을 입고 떨어지면 꿰매어 입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작업복도 떨어지면 버린다. 작업복의 경우 가격이 저렴하여 싸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헌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가평의 농촌 마을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주문을 하면 쉽게 옷을 구입할 수 있다. 오늘날은 옷이 풍부하고 그만큼 구입하기 쉽고 값싼 옷도 많다. 또한 현대인의 생활과 활동에 맞는 다양한 기능성 옷들이 판매되고 있어 예전보다 옷의 유형과 종류가 많아졌다. 가평의 주민들도 이러한 현대인의 의생활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근래의 한복]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복은 일상복에서 의례복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도 노인층에서는 일상적으로 한복을 입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점차 그 정도는 줄어들었다. 오늘날 가평 지역에서는 한복은 특별한 날에만 입는다. 회갑을 맞이한 부모님께 한복을 선물하기도 하고, 신랑 신부와 가까운 여성 친지들은 결혼식에 참석할 때 한복을 입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폐백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다. 신랑과 신부도 사진을 촬영하거나 결혼식 폐백을 위해 한복을 준비한다. 수의는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한복으로 한다. 가평읍 복장리의 사례를 보면 60대 이상 환갑을 넘긴 할머니들은 대부분 환갑 때 아들이 해준 한복을 가지고 있다. 대개 두루마기까지 완전히 갖추고 있다. 한복은 주로 서울 동대문시장 한복 전문점에서 맞춘다. 할아버지들은 결혼식에 참석할 때도 주로 양복을 입는다. 오늘날 60대 이하 젊은 사람들은 한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많다. 2000년 이전만 하더라도 노년층에서는 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최근에는 일상복에서 한복은 거의 사라졌으며 의례복도 양복으로 바뀌어 명절이나 제례에서도 양복을 입는 사람이 많다.
[신발의 변화]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는 고무신을 신기 시작했으나 그 이전에는 짚신을 신었다. 짚을 구할 수 없는 화전민들은 벼농사를 짓는 농가에 가서 짚단을 얻어 사용하였다. 북면 적목리 화전민들은 방안에 광솔불을 켤 수 있도록 설치한 ‘코쿨’에 불을 밝혀 그 앞에서 밤에 짚신을 삼았다. 당시에는 짚신이나 나막신을 신었고, 미투리도 혼례 때나 겨우 신을 수 있었다. 겨울에는 누더기로 감아 발이 상하지 않도록 했다. 짚이 없을 때는 동채 껍질이나 난채나무 껍질, 핏겻나무 껍질을 이용해서 신을 삼기도 했다. 나막신은 부드러운 누릅나무 껍질을 두껍게 말려서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고무신이 나오고 구두와 운동화 착용이 점차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고무신을 신는 사람은 드물다. 구두, 운동화, 샌들, 실내화, 장화 등 다양한 신발들을 상황에 따라 신고 있다.
[세탁의 변화]
북면 도대리의 경우를 보면 1972년 마을에 수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였다. 대촌마을 위쪽 대추나무 아래에는 예전에 빨래터가 있었다. 지금은 철골 구조물만 있지만 과거에는 그 아래 개울을 빨래터로 사용하였다. 해방 전후에는 세탁을 위한 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잿물을 이용했다. 짚으로 만들거나 참나무재를 시루에 넣고 그 물을 받아내면 잿물이 되는데 그 잿물에 빨래를 삶아서 빨았다. 그러나 때가 잘 지지 않았기 때문에 광목 같은 천은 검은 것이 잘 빠지지 않았다. 잿물 대신 오줌을 넣고 삶아서 빨기도 했다. 당시 양잿물은 비쌌고 비누는 시골에서 살 수 없었다. 광목 속바지 같은 것은 풀을 먹여서 빨아야 때가 잘 진다.
당시에는 빨래를 하여 널어서 말린 후 다듬이질을 해서 입었는데, 다듬이질은 두 사람이 손을 맞춰 두드렸다. 젖은 것을 두드리면 옷이 상하므로 완전히 마른 후 방망이로 광목이 반질반질해지도록 두드렸다.
옷에 풀을 먹이는 경우 입쌀을 담갔다. 가루를 내어 쑨 입쌀풀이 바느질하기에도 좋고 색도 하얗게 되었다. 밀가루 빨래풀은 바늘이 찐득찐득해져서 바느질을 하기에 어려웠으며 색도 누렇게 되어 좋지 않았다. 여름에 적삼 조끼나 중의의 경우 풀을 먹여서 다시 다림질을 했는데, 이때 두 사람이 같이 잡고 했다. 불을 피워 뜨거운 숯을 다리미에 넣은 후 옷감 위에 대고 다렸다.
시골에서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빨래비누가 유통되었는데 당시 보따리장수가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빨래비누가 나오자 빨래에 묻힌 후 방망이로 두드려서 빨았다. 부유한 집에서는 한국전쟁 무렵에도 빨래비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근래에는 세탁기와 세제가 있어서 세탁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정에 세탁기가 있지만 아직도 손세탁을 선호하기도 한다. 세탁기는 옷을 빨리 상하게 하고 전기 요금도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