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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04
한자 世界文化遺産-先史遺蹟-
영어의미역 Looking for Prehistoric Relics, World Heritage Dolme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송화섭

[개설]

선사 시대의 거석문화를 상징하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이자 거석 기념물로서 전 세계에 분포하는 석조 유물이다. 그런 고인돌이 현재 고창 지역에는 총 1,500여 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의 조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 고창 지역인 것이다. 고인돌이 거석 기념물 또는 무덤이라는 점에서 청동기 시대부터 고창 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사 시대 사람들은 왜 고창 지역에서 살았던 것일까? 고창 지역 전역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통해 선사시대 사람이 고창 지역에 들어와 살기를 원했던 배경과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청동기 시대에 사람들은 왜 고창 지역으로 몰려들었을까?]

2000년 12월 고창군 전역에 분포하는 고인돌 447기가 강화도와 화순의 고인돌을 양팔에 끼고 당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고인돌은 고창 지역에만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거석문화의 한 유형이다. 그런데 왜 고창 지역 고인돌이 그토록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된 것일까?

고인돌은 선사 시대 무덤의 한 양식이다. 고인돌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줄이면 ‘괸돌’이라 부르고, 영어로는 Dolmen이라 표기하며, 한자로는 지석묘(支石墓)라고 쓴다. 고인돌이 사람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고창 지역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좋은 것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선사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고창 지역의 자연 지리를 살펴보면 평지 돌출형 선운산지에 소요산경수산 외에 동부 산지에는 방장산·문수산·방문산의 호남정맥이 병풍처럼 고창읍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산지 외에 고창 지역은 낮은 구릉의 야산 지형으로, 남서쪽으로 해안을 두르고 해안 사구와 해수욕장의 넓은 백사장이 위치하고 있다. 고창 전역의 지형을 둘러봐도 고인돌을 채석할 수 있는 암석 지형이 매우 협소한데도 구릉 곳곳에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은 고인돌 사회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 시대에 사람들이 고창 지역으로 몰려와서 살게 된 것은 비옥한 토양 때문이었을 것이다. 석제품의 농기구를 사용하던 시기에 농사를 짓고 살기에는 고창 지역이 최적지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그 토질의 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수박과 땅콩, 복분자가 고창 지역의 특산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것도 모두 비옥한 구릉 지대의 토질 덕분이다. 청동기시대에 고창 지역으로 들어와 살던 사람들도 이러한 고창 지역의 지형과 지질을 발견하고 살기 좋은 고장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바람 타고 올라온 남쪽 지방의 고인돌]

고창 지역은 해안 지대에 속한다. 고창군의 해리면, 상하면, 심원면은 해안 지대에 속하는 행정구역이다. 물론 이 지역과 인접하는 전라남도 영광군 흥농면과 법성포 주변에도 고인돌은 산재하고 있다. 고창 지역에서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는 곳은 고창읍 죽림리 일대이다. 고창 지역 고인돌은 고창읍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신림면·성내면, 좌측으로 고수면·성송면·대산면과 전방으로 아산면·무장면·공음면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고창 지역의 전체 지형 구도를 살펴보면, 고창읍을 관통하는 하천이 고창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효자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창읍의 하천은 방장산에서 흘러온 하천과 문수산에서 흘러온 하천이 아산면에서 합수하여 주진천[인천강]을 이루고는 선운산 분지를 가로질러 줄포만[곰소만]으로 흘러내려 간다. 죽림리 고인돌군 앞으로 흐르는 하천은 방장산에서 내려온 물이 주진천[인천강]으로 향하는 지류이다. 지금도 민물이 줄포만[곰소만]을 통해서 선운사 입구까지 깊숙하게 들어온다. 주진천[인천강]의 하천과 줄포만[곰소만]의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에서 잡히는 장어가 풍천장어다. 이렇듯 주진천[인천강]은 고창 지역의 젖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사 시대 고창 지역에 들어와 살았던 사람들도 주진천[인천강]의 물줄기를 따라 고창 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해안에서 줄포만[곰소만]을 통해 고창 지역으로 들어와 드넓게 펼쳐진 완만한 구릉 지대는 선사 시대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비행기·고속버스·철도 등 교통수단이 다양하게 발달했지만, 선사·고대 사회로 올라갈수록 가장 편리한 교통망이 하천이었고, 교통수단은 작은 배였을 것이다. 고창 지역에서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도 처음에는 주진천[인천강]의 물길을 따라 고창 지역으로 들어왔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고인돌의 분포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선 고창 지역 고인돌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전라남도 화순과 경기도 강화의 고인돌도 해안과 관련이 있다. 화순은 영산강 유역 상류에 위치하고, 강화도는 경기만의 인후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화도의 대표 고인돌인 가장 근리 고인돌과 같은 형식의 고인돌이 북한강의 강변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인돌 문화가 바다를 통해 내륙으로 진입해 갔음을 보여 준다.

현재 동아시아 고인돌의 분포도를 살펴보면, 해안과 하천 유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동남 해안과 남해안의 섬진강·보성강과 서해안의 영산강·주진천[인천강]·금강·한강·대동강 유역과 발해만의 요하 유역 등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 서해안 지대의 고인돌은 해안 길을 따라 분포하면서 강물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 터를 잡는 방식을 보여 준다.

전라북도 진안 산간 지역의 고인돌이 금강을 따라 거슬러 온 것으로 보아야 하듯이, 고창 지역 고인돌 역시 줄포만[곰소만]에서 주진천[인천강]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창의 도산리 고인돌은 강화도와 북한강 유역, 대동강·청천강 유역, 발해만의 요녕성과 길림성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분포 현상은 고인돌 문화가 해류를 따라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고인돌의 해류 이동은 고인돌의 발상지가 대륙이 아니라 해양과 관련된 남쪽 지방이라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몽골, 러시아, 알타이산맥 등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고인돌의 한반도 자생론을 주장하려면, 지금까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배후 역할을 해 온 몽골과 러시아 일대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고인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한 단계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 신석기 문화의 발상지라는 러시아 바이칼호수 근처에도 고인돌은 보이지 않고,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지역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고인돌의 대륙 부재설은 동남아시아 전래설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고인돌의 진원지는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들 수 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고인돌 분포 빈도수는 매우 높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아직도 고인돌을 축조하여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 있을 정도로 고인돌 문화의 전승력이 강한 곳이다.

인도네시아는 적도 남쪽에 위치한 열도이다. 이곳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닷길을 이용하여 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북상하여 한반도에 올라올 수 있는 해류는 쿠로시오 난류이다. 쿠로시오는 환태평양을 환류하는 적도 해류가 필리핀 남쪽에서 베트남 연안과 대만을 경유하여 오키나와 열도를 거쳐서 북상하면 규슈를 통해서 제주도 남쪽에 다다른다. 한반도 남단에서 쿠로시오의 한 지류가 북상하여 서해안의 연안 항로를 타고 올라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쿠로시오는 돌멘로드(dolmen-road)라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고인돌이 이 돌멘로드를 따라 올라와 한반도에 당도했다고 본다. 돌멘로드는 바닷길이기에 배가 항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류를 통해서 그 길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예가 여름철에 불어오는 태풍이다. 태풍은 여름철에 불어오는 계절풍이다. 한반도로 올라오는 태풍의 진원지는 필리핀 남쪽이다. 매년 태풍의 진로는 일정하다. 여름철에 열대성 저기압의 적도 기류가 태풍을 만들어 북상하는데, 항상 쿠로시오와 규슈를 거쳐서 제주도와 한반도 남단을 경유하여 남동 해안 쪽으로 빠져 나간다. 이 태풍의 진로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 북부, 라오스, 중국 절강성, 일본 오키나와 및 규슈 동남단 지역, 제주도 등 해안과 섬 지역에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도 바로 쿠로시오 기류권과 고인돌의 분포권이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제주도의 가파도와 규슈의 사가현에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도 그곳이 쿠로시오의 바닷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제주도에서 서해안으로 향하면 전라남도 해역에 다다른다. 우리나라에서 전라남도에 고인돌이 제일 많이 분포하는 하는 것도 해안과 연계된 하천의 발달과 낮은 구릉 지형의 야산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일 것이다. 왜 전라남도에 고인돌의 조밀도가 높으냐는 명쾌한 대답은 해류 이동으로 풀지 않으면 미궁으로 빠질 수 있다. 전라남북도에는 유난히 강줄기가 많고, 경작 생활을 할 수 있는 구릉 지형이 많기에 당시 고인돌 문화를 가진 도래인들이 강줄기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와 정착하기에 매우 좋은 지형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고인돌 형태 바로보기]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분포 지역을 고려하여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하고, 형태를 살펴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위석식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북방식은 북쪽 지방에 위치하고, 남방식은 남쪽 지방을 주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사용된 용어라고 본다. 북방식이라 하여 고인돌이 러시아, 몽골, 만주 지방에서 한반도로 내려왔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방식은 한반도 남쪽에 주로 분포하는 고인돌을 가리키는 것이지,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고인돌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이제 고인돌의 형태에 따른 명칭도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 현재 고인돌에 적용되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것으로 정체성이 없다. 북방식과 남방식, 바둑판식과 탁자식이라는 용어는 일제 강점기 이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최근 학자들마다 새로운 명칭을 사용해 오고 있기에 혼란을 방지할 목적에서 새롭게 재정리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고인돌의 형태에 따라 개석식·위석식·석곽식 고인돌로 부르기도 하고, 고인돌의 하부 구조에 따라 부석형·포석형·적석형으로 분류하기도 하며, 외형적 상징성으로서 거석묘·큰돌무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기능상으로 제단식 고인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에서는 형태가 다른 고인돌이 발견되는 지명을 따서 오덕리식 고인돌, 침촌리식 고인돌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고인돌 연구에서는 다양한 형식 분류 체계도 중요하지만, 고인돌의 매장 형식과 건조물의 형태를 심도 있게 논의하여 합리적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시급하다. 고인돌의 명칭은 매장 주체부가 지상이냐 지하냐 하는 점과, 석곽이냐 석관이냐 하는 차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지금까지 사용해 온 북방식과 남방식, 탁자식과 바둑판식이라는 용어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나 형식 분류와도 거리가 멀고, 고인돌을 획일화시켜 버린다는 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고인돌의 구조는 무덤방과 덮개돌, 괸돌이 하나의 무덤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무덤방은 지상 석곽형과 지하 석관형이 있다. 지상 석곽형은 소위 탁자식 고인돌의 구조에 나타나고, 지하 석관형은 바둑판식 고인돌에서 나타난다. 탁자식 고인돌에서 석곽식이 아닌 두 개의 판석을 양쪽에 세우고 그 위에 얇고 넓은 판석을 올려놓는 탁자형도 발견된다. 이러한 고인돌은 고창의 도산리와 강화도 일대, 연천·포천·철원 등 북한강 유역의 고인돌 구조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판석 지주형의 고인돌은 지상 석곽형의 구도를 갖춘 곳도 있지만 그것과 다른 구조도 있다. 판석 지주형 고인돌은 경기 북부와 대동강, 요녕성, 길림성 지역에 집중 분포하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판석 지주형 고인돌은 군집이 아니라 단독으로 조성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도산리 고인돌이다.

사실, 판석 지주형 고인돌의 덮개돌은 사실상 무덤방과는 별개가 될 수 있다. 매장 주체부를 지하에 두고 지상에 덮개돌을 설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석 지주형은 지상 괸돌 형식과 지상 석곽식의 두 유형이 있다. 지상 괸돌 형식은 처음부터 무덤방을 지하에 조성하고 두 개의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평편한 판석을 얹어 놓는 형식을 말하고, 지상 석곽식은 무덤방을 지상에 두는 방식으로 사면을 판석으로 석곽을 만들고 위에 얇은 판석을 올려놓는 형식이다. 두 유형은 고창 지역에서 모두 보인다.

지상 석곽식도 긴 두 개의 판석을 괸돌로 좌우에 세우고, 앞뒤로는 작은 판석을 대는 석곽형으로 볼 때 판석 지주형의 변형 양식으로 볼 수 있다. 판석 지주형 고인돌은 군집이 아니고 한 기가 입지하는 성향이 높다. 판석 지주형 고인돌은 고창 지역에서 북상하여 강화도와 북한강 유역, 그리고 대동강 이북 요녕 지역에 분포하는 특성을 보여 준다. 요녕 지방은 판석 지주형보다 지상 석곽식으로 발달한 전형을 보여 주는데, 그 이전 단계가 고창 지역과 강화도 지상 석곽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창과 강화는 덮개돌의 얇은 판석이 자연석이나 요녕 지방의 석곽형 고인돌은 가공한 것처럼 평편하고 크다. 중국 요녕 지방의 와방점 대자유적, 장하 백점자 유적, 장하 대황지 유적, 개주 석붕산 유적, 대석교 석붕욕 유적, 해성 석목성 유적 등지의 판석형 지주와 덮개돌은 돌을 반듯하게 깎아서 축조한 형태들이다.

북방식 고인돌은 판석 지주형 또는 지상 석곽식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고인돌의 계통과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는 달리 소위 남방식 고인돌은 덮개돌이 큼직한 자연석 덮개돌로 괸돌 위에 올려놓은 방식으로 무덤방을 지하에 둔 형태다. 이러한 무덤 형태는 지하에 매장 주체부를 두는 방식으로, 덮개돌은 사실상 무덤방과는 별개다.

남방식 고인돌에도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큰돌 덮개돌을 괸돌 위에 올려놓는 형식으로 소위 바둑판식으로 불리는 경우이며, 탁자 형태로 4개의 석주를 기둥돌로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는 형태다. 남방식 고인돌은 하부 구조의 기준에 따라 괸돌식과 지주식 고인돌로 불러도 좋을 듯싶다. 괸돌이 여러 개의 괸돌이 육중하고 큰 덮개돌을 지탱하는 방식이라면, 지주식은 4~5개의 개의 돌기둥이 덮개돌을 받치는 형식이다. 이러한 유형의 고인돌은 주로 한반도 남쪽 지방에 분포하여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형태가 다소 차이가 난다.

고창 지역에서는 괸돌식 고인돌과 지주식 고인돌이 모두 발견된다. 특히 성송면해리면 일부 지역에서 보이는 지주식 고인돌은 괸돌식이라고 부르기에는 석주(石柱)가 입석 형태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지주식과 괸돌식은 고인돌 형태상 다른 유형과 형식으로 분류해야 한다. 어찌 보면 지주식 고인돌은 고창 지역에서만 독특하게 보이는 고창식 고인돌일 수 있다.

또 다른 고인돌의 형태로서 개석식과 위석식 고인돌이 있다. 개석식은 평편한 돌이 지표상에 덮여 있는 형식으로 괸돌이나 지주가 보이지 않는 고인돌 형태를 말한다. 개석식에서 한 단계 진보된 고인돌로 한쪽 들림형 고인돌이 있는데, 지표상에 놓여 있는 고인돌의 한쪽에 괸돌을 받쳐 놓은 형태이다. 이러한 고인돌 역시 서해안 인접 지역 곳곳에서 발견되며, 고창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위석식 고인돌은 작은 판석을 지석으로 빙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위석식의 지석이 판석이라서 판석 지주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판석이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로 원형을 이루어 지탱시켜 놓은 고인돌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분명하다. 위석석 고인돌은 여러 개의 판석을 괸돌로 둘러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아 무덤방을 지상에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지하에 두는 방식도 있다. 위석식 고인돌은 독자적인 또 하나의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넓은 의미에서는 판석 지주형 고인돌로 포함시킬 수 있다.

[고창식 고인돌의 형태]

고인돌의 입지를 놓고 본다면, 크게 산지형 고인돌과 평지형 고인돌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판석 지주형과 지주식 고인돌이 산지형 고인돌에 속한다면, 괸돌형 고인돌은 평지형에 속하는 고인돌이라 할 수 있다. 산지형 고인돌은 산 구릉의 정상부에 1기가 독립적으로 놓인 형태를 말하고, 평지형 고인돌은 논과 인접한 산 경사면에 떼를 지어 분포하는 특성을 보여 준다. 고창 지역의 경우 도산리 고인돌이 대표적인데, 요녕 지방의 지상 석곽식 고인돌도 입지적으로는 산지형 고인돌에 속한다. 산지형이라고 해서 높은 산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야산 정상부에 위치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위치한다.

산지형 고인돌에 속하는 유형으로 판석 지주형과 입석 지주형을 들 수 있는데, 판석 지주형의 변형 양식이 고창 지역에서 나타난다. 판석 지주형은 두 개의 판석을 세우고 덮개돌로 평편한 넓은 돌을 판석 위에 얹어 놓는 방식이다. 고창 지역에서는 두 개의 판석을 지주로 세우고 덮개돌을 남방식 고인돌에 사용하는 큰돌을 사용하고 있다. 죽림리 고인돌군에는 소위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결합된 고창식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판석형 지주형의 변형 양식으로 전형을 보여 주는 고인돌이 죽림리 Ⅰ지역과 고수면 마당바위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죽림리에는 또 다른 남방식 고인돌의 변형 양식이 나타나는데, 괸돌을 4개의 지주 형태로 세우고 그 위에 남방식의 큰 덮개돌을 올려놓은 형식이다. 이러한 변형 고인돌도 고창 지역에서 보이는 지주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결합된 것으로 고창식 고인돌이라고 부를 수 있다.

평지형 고인돌에 속하는 유형은 일반적으로 남방식 고인돌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하천 주변과 들에 위치하는 것으로 벼농사의 주체와 관련성을 가질 수 있는 고인돌이다. 지금은 들에 위치한 고인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논에 위치한 고인돌들이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데 장애가 된다 하여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매몰시킨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들판 곳곳에서 보이던 평지형 고인돌들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평지형 고인돌은 논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만들었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창 지역에서는 죽림리 일대에 남방식 고인돌이 많은데, 이러한 고인돌은 소위 낮은 저지대에 위치하는 평지형 고인돌로 분류할 수 있으며, 벼농사를 생업으로 생활한 사람들이 조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지형 고인돌에는 개석식 고인돌, 들림형 고인돌, 남방식 고인돌이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창 지역은 고인돌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남방식[판석 지주형]과 북방식[괸돌형 및 지주형] 등 다양한 고인돌이 분포하고, 변형 고인돌들도 다양하다. 고창 지역은 유형별로 본다 해도 한반도 고인돌 문화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고창 지역에서는 독특한 변형 양식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고창 지역은 남방식 고인돌의 북한계선이라고 말하고, 북방식 고인돌의 남한계선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창 지역 위쪽 지역에서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은 강화도와 경기만, 한강 유역을 들 수 있는데, 경기도에서는 남방식 고인돌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강 이북 지역에서 주로 보이는 소위 북방식 고인돌[판석 지주형]이 고창 지역 아래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남방식과 북방식의 고인돌 만드는 주체가 다르다고 보아야 하고, 두 주체가 고창 지역에 몰려 들어왔다고 보아야 한다. 무덤은 장제 문화라서 전통성이 매우 강하다. 조상 대대로 전승해 온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꾸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에 판석 지주형[또는 지상 석곽형] 장제를 가진 세력이 고창 지역으로 들어오고, 괸돌형과 지주식 고인돌 문화를 가진 집단이 역시 고창 지역으로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이 두 세력의 결합을 보여 주는 장제 형식이 변형 고인돌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고창 지역에는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남방식과 북방식의 일반적인 고인돌 형태 외에 지상 석곽식, 판석 지주형, 입석 지주형, 들림형 등 다양한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가히 고인돌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고창 지역 고인돌이 한반도 고인돌 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선사 시대 최고의 보금자리-고창]

청동기 시대 고인돌 사회의 생업은 기본적으로 벼농사이다. 벼농사가 남쪽 지방에서 전래해 왔다는 설은 기정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500년 전에 재배된 볍씨를 발견하였지만, 중국 하모도 유적에서는 기원전 7,000년 전의 볍씨를 발견하였다. 일찍이 김병모 교수는 인도네시아에서 고인돌과 벼농사, 난생 신화가 함께 한반도에 전래해 왔다는 주장을 펴 왔다. 이 세 문화는 동남아시아에서 해류 이동을 통해서 한반도에 전래해 왔다고 보는 시각이 옳은 듯하다. 벼농사의 발상지가 중국 남부인지 인도네시아인지는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고인돌 루트와 벼농사 생활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실제 고인돌이 분포하는 동남아시아의 생업은 벼농사이다.

고인돌 사회의 농법은 수전 농업이 아니라 전작 농업이었다. 수전 농업은 저습지에서 물을 이용할 수 있는 수리 시설을 갖추고 농사를 짓는 방식이나 전작 농업은 구릉지에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천수답의 한 유형이다. 초기 농경 방식에서 화전민들이 산에서 밭을 일궈 농사짓기를 시작했듯이, 야산에서는 밭작물 재배가 논 작물 재배보다 선행 방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농기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청동 제품으로 된 농기구는 없다. 청동기시대라 해도 농사짓는 도구는 석제품이었다. 석제 농기구는 돌칼·돌낫·돌괭이·돌보습 등 돌로 만든 것인데, 이러한 농기구는 저습지에서는 쓸모가 없다. 석제 농기구는 밭에서 소규모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용한 초기 재배 농경 단계의 농기구라 할 수 있다.

고창 지역의 지세는 완만한 야산의 구릉 지형이 많아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매우 선호할 수 있는 좋은 자연 지리의 조건을 갖고 있다. 당시 선사 시대 사람들도 고창 지역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는 판단에서 몰려들어 정착 생활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청동기 시대에 야산의 구릉 지형을 개간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이 남긴 장제가 고인돌이다. 고인돌 사회에서는 언덕배기나 구릉 지형에 벼를 재배하는 육도작의 농업이었는데, 지금도 고창 지역에서는 육도(陸稻)의 농법인 ‘천도(天稻)’라는 벼농사 재배 방식이 전해 오고 있다. 천도는 천수답의 도작 농법인데, 천도가 수도작으로 변모하는 방식이 계단식 농업 방식이다.

고창 지역에서는 산이 높지 않아 계단식 논을 찾아볼 수 없는데도 일부 지역에서 아직도 청동기 시대 농법인 천도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청동기 시대 육도작의 농법에 맞는 농기구가 반월형 석도이다. 반월형 석도는 벼이삭의 수확구로서 반달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명칭으로, 고인돌의 대표적인 부장품이다.

한반도 서해안과 도서 지역에서는 삼각형 석도의 출토 빈도가 높다. 반월형 석도는 손에 석도를 쥐고 벼 모가지만 딸 수 있는 돌칼이다. 당시 고인돌 사회에서는 벼 포기의 밑동을 철낫으로 베듯이 한 게 아니라 벼 낱알 부분만 채취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벼 수확 방식은 아직도 동남아시아에서 전승되는 농법 가운데 하나인데, 반월형 석도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벼농사 지대에서 발견되고 사용되는 농기구이다.

[전통 문화 체험의 장으로도 활용해 볼 수 있는 선사 유적지를 꿈꾸다]

구릉 지형에 집을 짓고 정착 생활을 하던 여인네가 밭에 나가 오른손에 반월형 석도를 쥐고 서서 누렇게 익은 벼이삭을 따서 벼 둥그리에 담는 모습은 꼭 선사 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지금도 고창 지역의 천도 재배지에서 재현해 볼 수 있는 수확 방식이다.

고창고인돌박물관에서 전통 문화 체험으로 반월형 석도를 만들어 천도를 수확하게 하는 것은 선사 시대 생활 체험일 수 있다. 나아가 돌괭이, 돌보습을 만들어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과정까지 선사 시대 생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창 지역에서도 청동기 시대 고인돌을 축조했던 사람들은 돌괭이로 땅을 파서 파종을 하고 돌칼로 벼이삭을 따면서 생활했을 것이다. 이러한 청동기 시대 농사짓기의 생활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된다면 고창 지역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선사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생활 문화 체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소망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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