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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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茂長蜂起 |
영어음역 | Mujang Bonggi |
영어의미역 | Mujang Uprising |
이칭/별칭 | 무장기포(무장기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공음리 당산마을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신순철 |
[정의]
1894년 3월 고창 지역의 무장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발단]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 등지에서 머물렀으나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도착하여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무장으로 피신하였던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3월 16일경부터 무기를 제작하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 등 재봉기를 준비하여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과 연합하여 고부뿐만 아니라 호남 일대의 각 군현에 통문을 보내 농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따라서 무장봉기는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 봉기가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의하면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군사 대오를 갖추고 중앙정부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경과]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들은 고부·태인·부안을 차례로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대파하였다. 사기가 충천한 농민군 진영은 남진하여 흥덕·고창·무장·영광·나주까지 진출하여 장성에서 중앙군을 대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일반적으로 동학 농민 혁명은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1차 봉기로, 9월 삼례봉기를 2차 봉기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동학 농민 혁명은 고부봉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한 연구 성과는 고부봉기와는 별개로 무장에서 농민 봉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곧 고부봉기가 해산된 이후 다시 무장에서 재봉기한 사실과 무장봉기는 고부봉기와 달리 1개 고을에 한정된 농민 봉기가 아니라 호남 전역에 걸친 농민 봉기로서 전국적인 농민 봉기 단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무장봉기는 19세기 후반의 ‘민란’이라고 불리던 고을 단위의 농민 봉기가 민란의 국지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발전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만 아니라 동학 농민 혁명 과정에서 고부봉기가 전국적인 무장봉기(武裝蜂起)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