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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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革命 |
영어공식명칭 | Donghak Peasant Revolution |
이칭/별칭 | 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갑오난,농민전쟁,동학난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신순철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심하여 일으킨 봉기.
[개설]
손화중포(孫化中包)를 중심으로 한 고창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일어난 각 지역 민란이 전국적인 항쟁으로 옮아 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지만 동학농민혁명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일부분 반영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군들 중 일부는 국권피탈 후 의병대에 투신하며 국권 회복에 힘썼다.
[역사적 배경]
동학농민혁명 은 조선 후기 중세적인 지배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삼정의 문란과 이에 따른 새로운 종교인 동학의 발생, 개항 이후 상업의 발달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 지주의 토지 과다 독점으로 인한 소농의 영세화라는 배경 아래 민중 의식이 성장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특히 민중의 각성으로 인한 항쟁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점차 전국적이며 대규모 항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경과]
1894년(고종 31) 1월의 고부 봉기 이후 고창의 무장현으로 피신했던 전봉준(全琫準)은 무장 지역 대접주 손화중을 설득하여 함께 봉기하기로 뜻을 같이하였다. 고창은 손화중포의 ‘선운산 마애불 비기탈취 사건’으로 동학의 교세가 커진 지역이다. 특히 무장 지역을 근거로 성장한 손화중포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적극적으로 봉기에 앞장섰다. 그해 3월 1차 봉기 과정에서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金開南)과 연합하여 고부뿐 아니라 호남 일대 각 군현에 통문을 보내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6일경부터 무장현 동음치면 구암리 당산마을 일대에 손화중 휘하의 동학농민혁명군이 모여 무기 제작 및 군사 훈련을 하였고,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3월 21일 무장을 떠난 전봉준·손화중의 동학농민혁명군은 흥덕 사포에서 숙영하고 백산에 모여 대오를 갖추고, 중앙정부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전국적인 농민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이때 고창현에서는 오하영·오시영·임형노·임천서·홍낙관·홍계관·손여옥 등이 1,5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하였고, 무장현에서는 송경찬·강경중·송문수·송진호·정백현·장두일·곽창근 등이 1,300여 명, 흥덕현에서는 고영숙이 7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은 무장기포 이후 고부·태인·부안을 차례로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대파하였다. 사기가 충천한 동학농민혁명군은 남진하여 흥덕·고창·무장·영광·나주까지 진출하였고, 장성에서 중앙군을 대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4월 말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감사와 합의하고 전주성에서 퇴각한 동학농민혁명군은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5월 고창 지역의 폐정 개혁은 손화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손화중은 전라도 해안 일대를 순회하기 위해 2,000여 명을 거느리고 흥덕을 경유하여 무장으로 가 9월 재봉기 전까지 무장의 도소에 거점을 두고 영광, 장성 일대의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끌었다. 이때 농민들은 관아를 찾지 않고 집강소를 찾아가 불편한 사정을 호소하였고 집강소에서는 모순을 시정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이유로 동학농민혁명군은 세를 불렸고 농민 봉기는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확산하였다.
이후 정부의 요청으로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친일 내각을 출범시켜 갑오개혁이 추진되는 한편, 청일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동학농민혁명군 진영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9월 중순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이때 고창 일대 동학농민혁명군도 총 봉기하였다. 고창에서는 임천서·임형노가 5,000여 명, 무장에서는 송경찬·송문수·강경중이 7,000여 명, 청송역에서 강경중이 3,000여 명, 흥덕에서 고영숙이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고창 일대 동학농민혁명군은 손화중 휘하로 집결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흥덕의 대접주 고영숙은 11월 홍낙관과 합세하여 장성, 나주 일대, 임천서는 함평, 유공선은 장성, 고성천은 나주, 흥덕의 대접주 고태국은 화약 제조 시설을 설비하고 광주[현 광주광역시]와 나주 등지를 공략하였다. 이처럼 9월 재봉기 때 고창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손화중을 따라 남하하여 함평과 장성 일대를 휩쓸고 해상 방어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11월 초 우금치 전투로 공주 점령이 좌절되면서 동학농민혁명군의 주력은 전주·태인으로 후퇴하여 해산하였다.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 남해안 일대의 동학농민혁명군은 1895년 5월까지, 황해도 지역에서는 1895년 7월까지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였다.
[결과]
동학농민혁명군은 폐정을 개혁하고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목적으로 공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공주 점령이 좌절됨으로써 혁명은 실패하였다. 손화중을 비롯한 지도부는 처형되었으며, 많은 동학농민혁명군이 죽음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요구한 폐정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일부분 반영되었으나 동학농민혁명군의 진압을 빌미로 파견된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2020년 현재 고창군 지역에서는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 손화중 피체지, 도솔암 마애불, 왕제산, 전봉준 생가 터 등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장소를 유적지로 관리하고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을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왕조의 중세적인 체제 모순을 개혁하고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군은 수취 체제의 문란으로 인한 수탈의 폐해를 혁파하고 신분 차별을 타파하여 소농민과 소상인의 안정된 삶을 요구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과 침략에 맞서고자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후반 조선이 처한 체제 모순과 외압의 시대적 조건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의 변혁 운동 가운데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가장 올바르게 인식했던 변혁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변혁 운동은 고창의 무장 봉기가 출발점이었다. 곧 고창 지역 손화중포의 인적·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고부에 한정되었던 농민 봉기가 전국적인 농민 봉기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고, 이후 집강소를 중심으로 한 개혁에서는 부분적이나마 하층민의 신분 해방과 무명잡세 철폐, 향리들의 횡포 근절 등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농민혁명군들 중 일부는 이후 의병대에 투신하여 국권 회복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