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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594
한자 禪雲寺白坡律師碑
영어음역 Seonunsa Baekpayulsabi
영어의미역 Stele to Baekpayulsa in Seonunsa Temple
이칭/별칭 백파선사비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선운사로 250] 선운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진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9월 9일연표보기 - 선운사백파율사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선운사백파율사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성격 기념비
양식 갓석|비신|좌대
건립시기/일시 1858년연표보기
관련인물 백파율사 긍선|추사 김정희
재질 화강암|오석[비신]
높이 133㎝
너비 53㎝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24-1 선운사지도보기
소유자 선운사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입구 근처 부도전 내에 세워져 있는 조선 후기 기념비.

[개설]

선운사백파율사비는 1858년(철종 9년)에 세운 것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에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巌) 등 백파의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고 하였다.

백파율사는 조선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교의 참신한 중흥을 일으킨 화엄종주이다. 이와 같은 백파율사의 업적을 김정희가 찬양한 내용이 적혀 있는 선운사백파율사비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율사의 업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건립경위]

백파율사 사후에 설두와 백암이 찾아와 김정희에게 글을 부탁하여 써주었는데,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위치]

선운사 매표소에서 100m쯤 가면 오른쪽 숲 속 부도전 내에 있다. 1998년 9월 10일 선운사 성보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박물관 내로 옮겨졌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에 놓였다.

[형태]

조선 후기 일반적인 형태인 갓석과 비신, 그리고 좌대를 갖추었으며, 비신 앞면에는 제목을 해서로 썼고, 뒷면에는 해서로 음기를 썼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는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금석문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한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것에 해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율사로 썼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혹자는 기(機), 용(用)을 살(殺), 활(活)로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하기도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에서건 살, 활, 기, 용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살, 활, 기, 용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한 가지 법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의리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 활, 기, 용을 백파를 구속했던 착상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파를 충분히 아는 것이겠는가.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분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곳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온갖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여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巌)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 다음과 같이 써서 붙인다.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기개는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였네. 부모 섬기기를 부처 섬기듯 하매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하도다. 그 이름 긍선(亘璇)이니 전전(転転)한다 말할 수 없다네. 완당(阮堂) 학사(學士) 김정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5월 일 건립하다[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年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殺活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殺活機用雖大蔵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妄以殺活機用爲白坡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与白坡頗有往復辨難者即與世人所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雖萬般苦口説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爲白坡碑也書示雪竇白巖諸門徒果老記付 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真實厥名兮亘璇不可説轉轉阮堂學士金正喜撰并書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日立].”

[의의와 평가]

백파율사는 오랫동안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인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조선 불교계를 다시 꽃피우게 한 화엄종의 종주이다. 선운사백파율사비는 평소 교유와 사상적 논쟁을 벌였던 추사 김정희가 1858년에 직접 비문을 짓고 비명을 썼다. 이를 인정하여 1986년 9월 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김정희는 비문에서 백파율사를 표현할 때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기운은 수미산도 누를 만하다”라는 명을 지어 백파의 대기대용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백파율사와 추사체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1.28 [정의], [위치] 수정 [정의]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 선운사 입구 근처 부도전 내에 세워져 있는 [위치] 선운사 매표소에서 100m쯤 가면 오른쪽 숲 속 부도전 내에 있으며, 현재는 약간 작은 모형의 닮은 비석이 원래 있었던 부도전에 서 있고, 원비는 1998년 9월 10일 선운사 성보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선운사 매표소에서 100m쯤 가면 오른쪽 숲 속 부도전 내에 있다. 1998년 9월 10일 선운사 성보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박물관 내로 옮겨졌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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