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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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음역 | Bulgyo |
영어의미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집필자 | 배옥영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지역에서 석가모니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개설]
불교라는 말은 석가모니인 부처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교세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이후이다. 기원 전후로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으며 서역(西域)과 중국을 거쳐 한국에도 전파되었다.
한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는 삼국 시대이다. 당시 고구려가 받아들인 불교는 주로 전진(前秦)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였으며,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는 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중국 남방의 불교였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처음에는 고구려로부터, 그 이후로는 백제와 중국의 남조·수나라·당나라 등지에서도 전래되었다. 이렇게 수용된 불교는 한국의 고대 신앙이나 고유 습속 등 전래의 문화와 잘 융화되어 민족문화의 훌륭한 모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변천]
호남 지역의 불교 역사를 볼 때 호남 지역의 일부인 고창군 지역에서도 한국의 여러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일찍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특히 백제의 불교 전래와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호남 지역의 불교사를 통해서 고창 지역의 불교사를 유추한다.
1. 삼국 시대
384년에 동진에서 마라난타가 해로로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를 통해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고 그가 창건한 사찰이 영광의 불갑사였다. 불갑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전래 사찰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해 불교 도래지란 의미의 불(佛)자와 육갑(六甲)의 천간(天干)인 갑(甲)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법성포에서 법성(法聖)은 불법과 성인이라는 의미이며 법성포라는 지명은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을 거쳐 칠산 앞바다를 항해 하던 중 부처의 형상을 발견하고 불법과 불상을 들여온 포구라고 해서 진량포라는 이름에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법성포 부근의 지명과 불갑사 대웅전의 처마 형태나 동물 형상에서 남방불교의 양식이 보이며 불회사(佛會寺)의 상량 기록에 마라난타가 개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일찍이 백제 때 불경과 불상 등이 전해지고 사찰이 세워지는 등 불교가 성장하였고 이는 당시 백제에 속했던 현 고창군 지역에서도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화엄10찰의 하나인 ‘지리산 화엄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이 창건된 지역이었다. 또한 교학의 부진으로 후기에 들어온 선종 9산 중에서 선종의 교세를 확장하는데 가장 선구적인 지역이었다. 이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이 지역과 연관되는 선문으로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보림사(寶林寺)[장흥군 유치면], 동리산파(桐裏山派)의 태안사(泰安寺)[곡성군 죽곡면], 사자산파(獅子山派)의 쌍봉사(雙峰寺)[화순군 이양면] 등을 들 수 있으며 주요 선사들로는 도의, 홍척, 혜철 등을 들 수 있다.
도의, 홍척, 혜절은 한국 선의 원류가 된 중국의 선사 서당 지장의 법을 전수한 자들로서 한국선의 창시자이며 마조선을 한국적으로 전개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독립된 산문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지리산 옥천사(玉泉寺)의 진감선사(眞鑑禪師) 문도들이 널리 활동했으며, 산문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사자산문의 개조인 영월 흥영사(興寧寺)의 철감선사(澈鑑先師) 도윤(道允)은 화순 쌍봉사에 주석하면서 광주의 약사암(藥師庵)과 증심사(證心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2.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들어 교선 통합을 위한 신앙 결사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신앙 결사는 그동안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작은 사찰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결성된 결사의 대표적인 것이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에 의한 선종의 수선사(修禪寺)와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1163~1245]에 의한 천태종의 백련사(白蓮寺)였다.
수선사는 승주 송광사를 근본도량으로 한 정혜결사였고, 백련사는 강진 만덕사를 근본도량으로 한 법화결사였다. 지눌이 돈오(頓悟)와 정혜(定慧)를 강조한 선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정혜결사를 통해 종교적 이념을 구현한 것이라면 요세는 지눌의 정혜결사의 영향을 받아 참회(懺悔)와 정토(淨土)를 강조한 천태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종교적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차이는 교화의 대상인 중생의 근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서 지눌의 선사상을 대상으로 하는 중생은 최소한의 지해(知解)정도를 갖고 있는 중생이었다면 요세의 천태사상의 대상이 되는 중생은 막중한 죄를 지어 자력으로는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중생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이 두 결사가 거의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불교 개혁 운동이 한국 불교사 뿐 아니라 정신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특히 당시 선종의 부각은 선종 자체가 지니는 혁신성과 자주성으로 인해 귀족성과 보수성을 지닌 교종보다는 정권을 잡은 무신들이 그들의 정신적 받침대로서 적격이라 생각하고 쉽게 수용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수선사를 개창한 지눌은 8세에 조계운손(曹溪雲孫) 종휘(宗暉)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1182년(명종 12) 25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전라남도 창평 청원사(淸願寺)에 머물면서 6조 혜능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훗날 지혜의 문이 열렸다.
1206년[희종 3]에 송광산 길상사로 가서 길상사의 이름을 정혜사로 고치려 했으나 이웃에 해소의 정혜사가 있어 왕의 교지를 받아 수선사로 고치고 당시 세속화되는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돈오 점수와 정혜쌍수의 종지를 마련하고 정혜결사라는 새로운 신앙결사운동을 일으켜 11년 동안이나 선풍을 일으켰다.
지눌을 이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무의자(無衣子)[1178~1234]는 화순 출신으로 유교적 분위기속에서 성장했으나 불문에 뜻을 두고 수선사로 출가하여 지눌의 신임을 받고 그 뒤를 이은 전법제자이며, 수선사 제2세로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여 간화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간화선의 한국적 수용은 지눌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한국에서의 전개는 혜심의 역할이 컸다.
또한 혜심은 유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까닭에 그의 후원 세력인 지방 사회 독서층을 유념하고 유(儒)·불(佛) 일치설을 내세워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이루려는 독특한 사상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단순히 불교내의 선교 융합의 문제에만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역할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흥 출신인 제6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1266~1292]의 불교는 고려 중기 선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그는 순천 정혜사의 창건자인 혜소국사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선풍이 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蒙呂)[?~1252]와 4세 진명국사(眞明國師) 혼원(混元)[1191~1271]을 거쳐 자신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는 12세[1174년]에 광양 천락사 균정(均定)에게 출가하여 천태교학을 배우고 23세에 승선에 합격한 뒤 천태학에 더욱 전념하여 모두 통효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지눌로부터 수선(修禪)을 권하는 시를 받고 공산 거조사와 송광산 길상사에서 선을 닦았으나 사상적 차이로 인하여 다시 월출산 약사난야에 머물면서 조계선에서 다시 천태교학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 무렵 탐진현[지금의 강진과 장흥]의 최표, 최홍 형제와 이인천 등의 요청으로 만덕산으로 옮겨 옛 만덕사 터에 80여 간의 사찰을 낙성하였다.
요세는 백년결사에 정진했으며 그 실천 내용은 천태지관, 법화삼매참의, 정토구생의 3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백년결사는 요세가 죽은 뒤 복잡한 형태로 사상이 전개되었으나 흥기해서 쇠퇴하기까지 대체로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만덕산 백년사를 중심으로 원묘 요세의 결사 정신이 진명국사 천인에서 진정국사 천책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계승되면서 동남백련(東南白蓮)[남백련은 만덕산, 동백련은 공덕산]으로 확장되던 시기[1243년]이다.
제2단계는 원혜와 무외대사 정오가 충렬왕의 원찰인 중앙 개경의 묘련사에 진출하여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까지 장악하게 된 시기이지만 사상적으로는 부원 세력적 귀족과 결탁하면서 귀족불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제3단계는 묘련사계의 귀족 불교에 대해 진정대사 천책의 법제자인 무기대사 운목이 백련사의 초기 결사 정신인 서민 불교를 되살리려는 새로운 백련사파가 등장하게 된 시기이다.
이와 같이 백련사와 수선사는 서로 다른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사상적 영향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요세가 참회와 정토를 강조하여 교화의 대상을 ‘죄의 업장이 깊고 두터워 자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하근기(下根機)의 인간’으로 설정한 반면, 지눌은 정혜와 돈오를 강조하여 교화 대상을 ‘최소한 지해력(知解力)이 있는 스스로 발심할 수 있는 상근기(上根機)의 인간’을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3.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조선 조정의 끊임없는 당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관군이 무너지고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는 등 파국지경에 이르렀다. 조정은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승려들이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으며 이 지역에서도 의승 육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인 뇌묵(雷默) 처영(處英)은 해남 대흥사 출신으로 휴정의 제자였다. 그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되어 1593년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처영의 제자였던 무안 출신의 중관(中觀) 해면(海眠)은 선교판사(仙敎判事)로 왜적을 막았다. 휴정의 제자였던 장흥 출신의 제월(霽月) 경헌(敬軒)은 선교판사로 우영장(右營將)을 맡았다. 역시 휴정의 제자였던 기암(奇岩) 법견(法堅)은 1594년에 총섭(總攝)을 맡아 입암산성을 축조하였다. 휴정과 선수의 제자였던 담양 출신의 소요(逍遙) 태능(太能)도 왜적과 맞서 싸웠다.
왜란이 끝난 뒤 이러한 의승군의 활동과 업적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불교의 제반업무를 총괄하고자 총섭직을 두었는데, 1894년 갑오경장과 함께 남한산성의 승영(僧營)이 폐지될 때까지 약 3백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군 조직은 평상시에는 각족 역(役)과 축성(築城) 작업에 동원되었으며 그 경비 또한 자비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어 사원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당시 이 지역에서도 장성의 입암산성, 담양의 금성산성 등의 축성 작업이 이루어졌다.
육지뿐만 아니라 의승수군의 활약 또한 적지 않았다. 그들의 활동 상황은 여수의 영취산(靈鷲山) 흥국사(興國寺)에 소장된 자료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1592년에 전라좌수영의 의승수군이 결성되었으며, 승장들의 출신지는 주로 순천, 광양, 고흥, 광주, 곡성 등이었다.
[현황]
현재 고창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주요 사찰로는 조계종의 동운암·운선암·문수사·상원사·보은사·소요사·임공사·황선암·성봉암·몽불사·연화사·용화사·신광사·선운사·대참사·도솔암·석상암, 한국불교 태고종파와 대한불교 불입종의 일광사, 대한불교 일승종의 용화사, 대한불교 조동종의 관음사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중 대표적인 사찰은 선운사라고 할 수 있다.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산[도솔산]에 있는 사찰이다. 미륵신앙의 주요 발원지의 하나이며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 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577년(위덕왕 24)에 고승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 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승려 검단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고 이 자리에 절을 세워 바로 선운사의 창건되었다. 검단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검단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 이름도 ‘검당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 년 동안 행호선사(幸浩禪師) 극유(克乳)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德源君)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여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는데, 1613년(광해군 5)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과 함께 재건을 시작하여 1619년 완성했으며, 그 뒤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선운사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280호인 선운사 지장보살좌상이 있으며, 선운사 대웅전도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