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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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敏著 |
영어음역 | Gang Minjeo |
이칭/별칭 | 내숙(來叔),모산(茅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기화 |
성격 |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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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
성별 | 남 |
생년 | 1651년 |
몰년 | 1705년 |
본관 | 진주 |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내숙(來叔), 호는 모산(茅山). 강희맹(姜希孟)의 8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 강계오(姜繼吳)가 전라남도 영광에서 세거하다 처가[진주정씨(晉州鄭氏)]와 외가[무송유씨(茂松庾氏)]가 있는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강필주(姜弼周)이다.
[활동사항]
강민저(姜敏著)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의지가 굳고 문장이 탁월하여 37세 때인 1687년(숙종 13) 정묘소(丁卯疏)를 올려 민생 문제와 풍속의 퇴폐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43세 때인 1693년(숙종 19) 「자경문(自警文)」을 지었고, 이듬해 4월 영의정을 만나 본 후 인현왕후 복위를 상소하며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간신들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너무 우직하고 강경한 언사로 인해 전라남도 진도(珍島)로 유배를 가야 했다. 3년 뒤 죄가 풀려 집에 돌아온 뒤 혼탁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수간에 모산초당(茅山草堂)을 짓고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등 당대의 명유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 1705년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모산집(茅山集)』 3권 2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