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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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樂寬 |
영어음역 | Hong Nakgw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문병학 |
[정의]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활동사항]
홍낙관은 본관이 남양(南陽)이며, 1850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제외하고 출신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평소 호탕한 성격에 귀티가 흐르는 미남형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고창읍 화산리에 사는 남양홍씨 집성촌을 찾아가 홍종운(洪鍾雲)[1844~1925]을 만나 후 동학 접주 유동근(劉東根)·유치호(劉致鎬) 등의 천거로 동학에 입교(入敎)하여 접주가 되었다. 이후 고창읍의 당골댁에 살림을 차리고 당골의 재인 등 천민들을 설득시켜 동학 내에서 자신의 기반을 확충시켰다가 동학 농민 전쟁 당시 천민 부대를 이끌었다.
1894년(고종 31) 1월 제1차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홍낙관은 그 해 3월 동생 홍계관(洪繼寬)과 함께 고창에서 농민 혁명에 가담해 대성(大成) 수접주(首接主)로서 무장·백산·황룡촌·전주성 등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세력을 확장해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형성한 뒤 손화중(孫化仲) 포의 선봉장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는 흥덕 두령 고영숙(高永叔) 부대와 함께 나주·장성까지 휩쓰는 등 동학 농민 혁명을 주도하였다.
12월 9일 관군에 체포되어 곧바로 일본군에 넘겨진 뒤, 이듬해 1월 서울의 일본공사관으로 압송되어 그 해 3월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곤장 100대를 맞고 삼천리 밖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6년 8월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구대접(九大接) 설포(設包)를 건의하는 등 동학의 재건에 힘쓰던 중 1899년 동학 농민 혁명을 전개할 때 주도자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으나,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