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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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起 |
영어음역 | Seo Gi |
영어의미역 | Seo G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가(待可)이고,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구당(龜堂)·봉와(蓬窩)이다. 아버지는 서구령(徐龜齡)이다.
선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신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권문해(權文海)는 비미(卑微), 박지화(朴枝華)는 누세한족(累世寒族)으로 아버지가 서구령이라고 적고 있다. 허목(許穆)은 천인(賤人), 남하정(南夏正)은 전야인(田野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경원(黃景源)의 묘표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서승우)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익은 “집이 미천하고 세상에서는 본래 종승 심열의 종이었다”고 기록하였으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심충겸이 하사받은 노(奴)로 학문에 힘쓰고 행실이 독실하므로 면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활동사항]
주로 계룡산 고청봉 아래 공암(孔巖)[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과 지리산 등지에서 은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홍주교수 당시 이지함(李之菡)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이때 이지함은 중봉의 학문이 고매함을 보고 성혼(成渾),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이산보(李山甫)와 더불어 서기를 사우(師友)로 추천했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서기의 교유 관계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자 서기의 문인들이 정개청(鄭介淸)이 서기와의 관계를 밝힐 것을 걱정한 사실과, 정개청에게 화답한 시가 『고청유고(孤靑遺稿)』에 수록된 것으로 볼 때 기축옥사에서 정여립(鄭汝立)의 당으로 분류되었던 정개청과 일정한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축옥사에는 최영경(崔永慶), 조종도(趙宗道), 유종지(柳宗智) 등 조식(曺植) 문인들이 많이 연루되었으며, 서기가 이지함과 함께 조식을 방문한 것으로 보아 조식과도 일정한 교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문과 사상]
서기는 출사에 직결되는 성리학의 이론 학습보다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학문적 정열을 쏟았다. 서기가 서경덕(徐敬德)·이중호(李仲虎)·이지함을 사사한 것도 이들의 학풍이 신분관이나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백가는 물론 기술 이론까지 통달하였으며, 선학(禪學)을 좋아하였다. 특히 이지함을 만나면서 비로소 유학이 정도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리학자이면서 노장 사상을 절충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서기가 도가적인 성향이 있었음은 박지화와 함께 언급된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박지화는 서인(庶人)이다.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또한 이학으로 명성이 있었다. 서기는 천인이다. 경학에 밝아 문인들에게 가르쳤으며 사람이 산수를 좋아하여 명산에 은거하였다. 대개 화담(花潭) 문하의 제자들은 자못 기이한 것을 좋아하니 세상에서 박지화를 신선이라고 여긴다. 서기는 전지지술(前知之術)이 있다고 하였다.”
천문에도 능해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을 만들었고, 조헌 등과 함께 중국과 다른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 체계를 제시한 동방분야도(東方分野圖)를 고쳤다고 한다.
홍주(현 충청남도 홍성군의 옛 이름)와 지리산, 계룡산 근처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講學)에만 전념하였다. 노년에는 계룡산 고청봉 아래 공암에 정착하여 6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 동안 살았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 『고청유고』가 있다.
[상훈과 추모]
충현서원 별사에 배향되었다. 충현서원은 1581년(선조 14)에 서기의 제자들이 주도하고, 당시 공주목사 권문해가 쌀과 콩 등 재정을 지원하여 서기가 제자를 가르치던 공암에 세워진 서원으로, 충청남도 최초의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