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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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奎漢 |
영어음역 | Jeong Gyuhan |
영어의미역 | Jeong Gyuh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화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 |
성격 | 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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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화헌리 |
성별 | 남 |
생년 | 1750년 |
몰년 | 1824년 |
본관 | 장기(長鬐)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장기(長鬐). 할아버지는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의 제자 정래교(鄭來僑)이다. 아버지는 종제 정래숭(鄭來崇)의 장남 정광흠(鄭光欽)으로, 후사가 없는 집안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어머니는 풍양조씨 조벽(趙壁)의 딸로 풍녕군(豊寧君) 조응록(趙應祿)의 6대손이다. 부인은 청송심씨 심태진(沈泰鎭)의 딸로 부원군 심온(沈溫)의 후손인데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정규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 성산이씨는 이순익(李舜翊)의 딸로 좌찬성 이수(李穗)의 후손이다. 아들 정수린(鄭秀麟)과 정수기(鄭秀麒), 딸을 하나 두었다. 딸은 통덕랑 밀양박씨 낙촌(駱村) 박기후(朴基厚)의 아들인 박화진(朴華鎭)에게 시집갔다.
[활동사항]
성리학자로 유명한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728~1807]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80년(정조 4) 사마시에 급제하였지만,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성리학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1790년(정조 14) 성균관시에서 왕이 직접 책문하였을 때 정규한의 대책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들었다. 1795년(정조 19) 유생들의 글을 뽑을 때 고시(古詩)로 으뜸으로 뽑혀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 『주자백선』은 정조가 직접 편찬한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 널리 반포되지 않았던 것이어서 주변 사람들은 이를 커다란 영광으로 여겼다. 또한 산수를 좋아하여 자연을 벗 삼아 시문에도 정진하여 이름을 떨쳤다.
[저술 및 작품]
자손들을 경계한다는 「계자손서(誡子孫書)」, 「장기정씨 족보서문」 등을 지었다. 문집인 『화산집(華山集)』이 있고, 공주의 『향약절목(鄕約節目)』을 지었다.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화헌리에 있는 화산사 뒤쪽 산기슭에 묘소와 묘비가 있다. 묘비는 1835년(헌종 1)에 세워진 것으로 정규한의 재종질인 송치규(宋穉圭)가 찬하고, 손자인 정혼(鄭焜)이 추기를 썼으며, 고손자 정봉(鄭金+鳳)이 서하였다. 정규한의 가계와 그의 효행, 학문에 관한 일화를 기록하였다.
[상훈과 추모]
1832년(순조 32) 문인과 후손들, 사림들이 정규한의 영당을 보관하기 위한 화산영당의 건립을 청원하고, 관찰사가 상언(上言)하여 고향인 공주시 계룡면 화헌리에 화산영당을 창건하였다. 또한 1858년(철종 9) 정해명 등 공주 유생들의 상서로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되었다. 화산영당은 1962년 중수하면서 화산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