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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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錫七 |
영어음역 | Hyeon Seokchil |
영어의미역 | Hyeon Seokchi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국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현석칠(玄錫七)은 1880년(고종 17) 1월 23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3월 중순경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에 기독교 대표로 참가하여 국민대회의 간부를 맡아 운동자금을 제공하고 격문(檄文)을 인쇄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현석칠은 1919년 3월 12일과 3월 15일에 걸쳐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된데 자극받아 공주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과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동경 청산학원 유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등과 함께 1919년 3월 24일 밤 9시경, 영명학교 사택에서 만나 1919년 4월 1일 공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919년 4월 1일 오후 2시 공주읍 장날에 학생들과 함께 대형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 후 현석칠은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35년 만주로 건너갔다. 1939년 만주선교연회에 입회한 현석칠은 북만주 사평가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43년 9월 23일 55세에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