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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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窯址 |
영어의미역 | Kiln Site |
이칭/별칭 | 가마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가마 터.
[개설]
요지(窯址)는 토기·질그릇·오지그릇·도자기·기와·벽돌·숯 따위를 구워내는 시설을 뜻한다. 공주 지역에도 이와 같은 요지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백제의 왕도였던 공주에서는 왕실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사용하는 그릇과 기와 등을 다량으로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은 구운 벽돌을 이용해 축조되었으므로 가까운 공주 일대에서 벽돌을 굽는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령왕릉의 벽면을 이루고 있는 전돌은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데 매우 수준 높은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백제 왕궁과 무덤의 조성과정에서 활용된 자재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공주 일대에서 확인된 고분 출토 토기와 자기류의 부장품 역시 모두 공주에서 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대체로 가까운 지역의 요지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면 공주에는 많은 요지가 존재했을 것이다. 지금은 도굴 및 각종 개간 사업으로 요지 유적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렵다.
[요지의 분포]
1998년 공주 일대의 지표상에 남아 있는 유적을 조사한 공주시 문화유적분포지도 사업의 결과, 공주에서는 모두 61개의 요지가 확인되었다. 토기 요지 및 도자 요지는 46건, 와요지는 9건, 야철지는 6건이 확인되었다. 시대적으로는 원삼국시대에서 조선 말기까지 전시대적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탄압을 피해 숨어 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를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사연을 간직한 옹기 요지도 공주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1998년 조사에서는 제외되었다. 공주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요지는 그릇을 만드는 도요지와 기와를 굽는 와요지이다.
[도요지]
192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는 공주 학봉리 도요지를 발굴하여 5기의 분청사기 가마와 1기의 백자 가마를 확인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행된 가마터 발굴 조사였다. 그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신영리 청자 도요지, 도신리·가산리·중흥리·온천리·안양리의 분청사기 도요지, 학봉리의 조선 초기 백자와 분청사기 도요지, 공암리의 조선 중기 백자 도요지 등이 확인되었다.
해방 후에는 신영리의 11세기 청자 도요지, 의당면 가산리와 중흥리의 15세기 분청사기 도요지가 조사되었다. 1992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에서 공주 학봉리 도요지를 재발굴하여 15~16세기 분청사기 가마의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신영리 도요지는 공주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청자 도요지로 11세기경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발견된 도편의 모양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도요지의 존속 기간이 짧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15세기 초반 운영된 도신리·중흥리·가산리 도요지의 출토품들은 형태가 조잡하고 문양의 표현이 단순하고 산만하게 표현된 채 나타난다. 이 도요지들에서는 15세기의 대표적인 미술 작품인 분청사기의 형태가 아직 갖춰지지 않고 있다.
공주의 도요지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주에는 자기소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주의 북쪽 군지촌(軍知村)에 있고, 다른 하나는 동쪽 동학동(東鶴洞)에 있는데, 모두 중품(中品)이다. 도기소(陶器所)는 주의 남쪽 분포황옹장(粉浦黃瓮匠)과 주의 동쪽 구이동(仇耳洞)에 있는데, 모두 하품(下品)이다.”
이 기록에 대해 일본인 학자 고모토후쿠지[香本不苦治]는 동학동을 현재의 학봉리라고 주장하였으며, 현재의 학자들은 가산리의 분청사기 요지를 군지촌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추정이 사실이라면, 학봉리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1420년경에 요업 활동을 시작한 셈이 되고,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철회분청사기를 대량으로 생산한 것이 된다. 학봉리는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분청사기 도요지이다.
15세기를 주도한 분청사기는 백자가 확대되면서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에 걸쳐 점차 제작이 위축되었으며, 백자가 전국 지방의 가마에서 생산되었다. 학봉리에서도 이 시기의 분청사기와 함께 백자편이 발견되기도 한다. 백자는 사용 계층이 확대되어 조선 후기에 운영된 소규모의 청화백자 도요지가 계실리와 신영리에서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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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공주 지역의 도요지
[와요지]
공주는 웅진백제의 도성이었던 600년대 중반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도 서부 지역의 행정 중심 도시였다. 공주 공산성과 고을 가운데에는 관청 건물이 즐비했을 것이므로 이 건물들의 주요 자재인 기와는 가까운 곳에서 조달했을 것이다. 일례로 부여의 정암리 와요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와편이 부여 왕궁터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여 정암리에서 제작된 기와가 백제의 주요 건물에 공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1998년 지표 조사 과정에서 나타난 와요지는 모든 유구의 상태가 완전히 훼손되어 원형을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주변에서 발견되는 소토와 와편을 통해 와요지의 시기를 편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공주시내권에 위치한 검상동 와요지는 백제시대의 와편이 발견되어 주목되기는 하나, 파괴된 상태이다. 반포면 상신리 와요지는 가까운 구룡사에 공급하기 위해 운영되던 와요로 추정되고 있다. 도신리와 상룡리의 와요지에서는 조선 말기까지 민수용 기와를 제작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최대 기와 생산 유적, 운암리 와요지]
사곡면 운암리의 와요지는 2007년 전통불교문화산업지원센터 부지에 대한 문화 유적 발굴 조사로 확인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와요지이다. 특히, 이 유적은 와요 56기와 기와의 제작과 관련된 작업장 및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수혈 유구 30기 등이 확인됨에 따라 국내 발굴사상 가장 많은 수의 조선시대 와요가 확인된 유적으로 주목되었다. 이 유적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마곡사에 필요한 기와의 생산과 공급 관계를 보여주는 대단위의 기와 생산 장소였던 것이다.
운암리 와요지는 이와 같은 마곡사의 역사 속에서 건물의 보수 및 수축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리적으로 주변 지역을 잇는 요충지로서 인근 지역에까지 기와를 공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 내에서 가마의 배치는 구릉의 상부에서 하부까지 크게 3단계(14기-12기-30기)로 이루어졌으며, 단독 혹은 2~4기씩 쌍을 이루고 있다.
또한 동일 가마 내에서의 중복 관계와 다른 가마와의 중복 관계도 확인되었다. 31기의 가마 가운데 29기는 평면 장방형의 소성실 바닥면이 경사를 이루고, 소성실과 연소실 사이에 하나의 단을 둔 등요의 형태다. 이들은 단을 이루는 구릉의 끝부분에 경사면을 따라 조성되었으며, 장축 방향은 등고선 방향과 직교한다.
대부분의 가마는 요전부를 제외한 전체 잔존 길이가 700~1600㎝ 정도이다. 소성실은 길이 600~950㎝, 너비 140~260㎝, 경사도 3~22°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소성실의 바닥면에는 암키와나 수키와를 깔아 기와를 쌓아두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가마에서 출토된 유물은 암막새·수막새·평기와 등의 조선시대 기와류가 대부분이며, 토제의 고드래, 분청사기·백자 등의 자기류, 새모양의 토제품 등도 확인되었다.
운암리 와요지는 마곡사 일대 기와의 생산 및 공급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이 유적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지역의 수공업과 사원 경제 및 사원과 지역 사회와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