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583 |
---|---|
한자 | 公州高等普通學校同盟休校事件-年- |
영어의미역 | Gongju High School Strike in 1929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중학동 13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허종 |
[정의]
1929년 12월에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공주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일으킨 동맹 휴교 사건.
[역사적 배경]
1929년에 발생한 공주고등보통학교동맹휴교사건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1929년 11월 3일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다.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당시 전국 곳곳에서는 학생들이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확립, 식민지적 노예 교육의 철폐,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학생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원인은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적 노예 교육이다. 1922년 5월에 개교한 공주고등보통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다닌 학교였다. 교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교사는 일본인이었으며, 이들은 조선을 무시하고 조선인을 폄하하는 말과 행동을 자주하였다. 이에 맞서 1927년에 공주고보 동맹휴교사건이 일어났지만,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민족 차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인 학생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5학년 담임인 일본인 교사 가루베[輕部]가 학생 8명을 데리고 충청남도 경찰부장 야노[矢野]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의 행위가 학생을 경찰의 첩자로 삼으려는 매우 부당한 행위라고 격분하였고, 1927년에 이어 두 번째 동맹 휴교를 준비하였다.
[경과]
공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 4학년 이관세(李寬世)는 공주청년회 집행위원장 윤귀영(尹貴榮)을 만나 일본인 교사의 행위를 설명하고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윤귀영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격려하였다. 이관세는 12월 1일 주외면 금성리 산성공원 부근의 웅심각(雄心閣)에서 4학년 조선인 학생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동맹 휴교를 계획하였다.
12월 2일 공주고등보통학교 4학년 학생뿐만 아니라 2학년, 3학년을 포함한 조선인 학생 2백여 명이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다. 학생들은 6개 조항의 요구 사항을 담은 진정서를 교장에게 제출하고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요구 사항은 첫째, 일본인 교사 가루베는 사직할 것, 둘째, 학교 당국은 학부형에 대한 태도를 신중히 할 것, 셋째,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차별을 없애고 공평하게 대우할 것, 넷째, 학생 처벌을 경솔하게 처리하지 말고 학부형을 호출하지 말 것, 다섯째, 학생들의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 여섯째, 도서관에 조선어 잡지를 확충할 것 등 이었다.
학생들은 충청남도 학무과에도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학생들이 동맹 휴교에 들어가자, 교장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학생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동맹 휴교가 불온분자의 선동으로 일어났다고 보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학생들을 위협하였다. 충청남도 학무과 과장도 학교를 방문하여 진상 파악에 나섰다.
12월 3일 학부형 30여 명이 학생들과 대화를 요청하였다. 학생들은 1927년 동맹 휴교 당시 학부형회의 기만적인 행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응하였다. 학부형들은 학부형대회를 12월 10일에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각 학부형에게 소집 통지서를 보냈다.
12월 5일 학교에서 학생 대표와 학부형들이 회합하여 토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기숙사를 탈출하여 행적을 알 수 없다는 내용의 전보를 학부모에게 보냈다. 학교의 전보를 보고 놀란 학부형은 학교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학부모는 진상을 파악하고 학교 당국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비난하였다. 학생들은 학부모의 설득에도 강경한 자세를 취하며 동맹 휴교를 계속하였다.
12월 7일 학부모가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시키고, 학교 당국은 기숙사에 있는 학생 40여 명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학생들은 요구 사항의 관철 없이는 등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같은 날 오후에 학생들은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뜻을 학교와 교육 당국에 충분히 알렸다고 판단하고, 12월 9일에 등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과]
학생들이 등교 입장을 밝히자, 일본 경찰은 12월 7일과 8일 사이에 이관세, 나병갑(羅秉甲), 나상도(羅相度), 나인종(羅仁鍾), 김기혁(金基赫), 백낙순(白樂純) 등의 학생 6명을 동맹 휴교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였다. 학교 당국은 이들을 퇴학 처리 하였다. 또한 공주청년회 집행위원장 윤귀영도 동맹 휴학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관세와 윤귀영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30년 3월 모두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공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사건은 학생들의 요구 사항은 관철되지 않은 채, 학생들만 퇴학을 당하거나 구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일제 교육 정책을 비롯한 식민지 지배의 허구성을 폭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