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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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吉再遺墟碑 |
영어의미역 | Gil Jae's Monumental Stone |
이칭/별칭 | 고려문하주서야은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遺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24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관 |
성격 | 금석각류|유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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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일반형 비석 |
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관련인물 | 길재(吉再) |
재질 | 사암 |
높이 | 143㎝ |
너비 | 45㎝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249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길재의 유허비(遺墟碑).
[개설]
야은 길재는 고려 후기의 인물로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서 배웠으며,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태종이 태상박사(太常博士)라는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1419년(세종 1)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길재를 후세 사람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의 삼은이라 일컬어 높은 충절과 고매한 학덕을 추모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으로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 주었다.
모친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였으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그 학맥을 이었다.
[건립경위]
야은 길재가 불사이군의 굳은 의지로 초야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자 그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비가 세워졌다.
[위치]
구미시 남통동 채미정(採薇亭) 경내의 북측 비각 내에 있다.
[형태]
비석의 재질은 사암으로 되어 있으며, 덮개돌 없이 비신의 상부가 둥글게 된 원수(圓首)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높이는 123㎝, 너비는 45㎝이며, 비좌의 높이는 20㎝, 너비는 81㎝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고려문하주서야은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고, 제명(題名)이 앞면에 세로 2줄로 새겨져 있다.
[현황]
길재 유허비는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세운 채미정의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세워져 있다. 채미정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상태는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길재는 충절과 학덕으로 후세 인물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학문과 삶을 본받고 가르침을 잊지 않고자 하는 이들이 늘 존경해 마지않았던 인물로서 이곳을 찾는 이에게 불사이군의 절의를 확인할 수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