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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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利川戰鬪 |
영어의미역 | Illicheon Bat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박보현 |
성격 | 고려-후백제 간 전투|영토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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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936년 9월 |
발생(시작)장소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리천 |
[정의]
936년 고려와 후백제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싸운 전투.
[역사적 배경]
신라 하대에 들어오면서 골품제가 붕괴되고 중앙귀족이 왕위쟁탈전을 벌이자 주군현이 공부(貢賦)를 거두어들일 수 없게 되었다. 나라 창고는 고갈되고 왕은 조세의 납부를 독촉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도적이 상주의 원종·애노, 북원의 양길·궁예, 완산주의 견훤 등이다.
[발단]
특히 견훤은 상주 가은현 출신인데, 군인으로 왕경에 출사하였다가 서남해 방수에 부임하였으나 국정의 문란을 틈타 900년(효공왕 4)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후백제 왕이 되었고 907년에는 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공격하여 손아귀에 넣었다. 한편 궁예에 투탁했던 송악(松岳) 출신 왕건은 918년 철원(鐵原)에서 왕에 즉위하고 919년 고려를 건국한 뒤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920년(경명왕 4) 신라 왕과 고려 태조가 교빙(交聘)을 맺게 되면서 영남 지역은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지로 탈바꿈하였다.
920~927년에 왕건은 근품성(상주)-고울부(영천)-왕경(경주) 전선을 구축하였으며, 견훤은 대야성-진례, 대목(약목), 왕경을 노략하고 근품성과 가은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두 왕조 사이의 영토전쟁은 930년 정월에 안동부의 북쪽 10리에 있는 병산(甁山) 아래에서 싸웠는데 견훤군 8,000여 명이 죽었다.
이런 와중에 태조는 935년 겨울 10월에 신라의 항복을 받아 신라를 병합하는 데 성공한 반면, 후백제는 왕위쟁탈로 내분이 일어나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였다. 936년 3월 견훤은 고려에 투항하고 그의 아들 신검(神劍)이 정권을 잡았다. 견훤은 태조 왕건에게 의탁하여 아들에 대한 복수를 꾀하면서 936년 6월 견훤이 태조에게 후백제를 치고자 건의하고 태조가 이에 응하여 군대를 출동하였다.
[경과]
견훤의 청을 받아들인 태조는 936년 6월에 태자 왕무(王武)와 장군 박술희(朴述熙)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했다. 같은 해 가을 9월에는 자신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서 선발대와 병력을 합세하여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으로 진격하였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도 이에 대항하여, 두 나라의 군대는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태조와 견훤은 관병(觀兵)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좌익(左翼), 우익(右翼), 중군(中軍), 선봉(先鋒)으로 나누어 진을 쳤는데, 수십 명의 장수들과 그들의 지휘 아래 모인 기병·보병을 합해 8만 7,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
이에 맞섰던 후백제 군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전쟁 기록에서 일부나마 알 수 있다. 예컨대 고려군이 몰려오자 장군 효봉(孝奉), 덕술(德述), 애술(哀述), 명길(明吉) 등 4명은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서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을 회유하여 장수의 소재를 물으니, 봉길 등이 말하기를 “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다” 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에게 중군을 바로 치도록 명하여 삼군(三軍)이 일제히 협격하니 후백제군은 패배하였다.
[결과]
이 전쟁에서 패퇴한 후백제군은 황산(黃山) 탄현(炭蜆)에 이르게 됨에, 신검과 두 동생, 장군 부달·소달·능환(能奐) 등 40여 명을 산 채로 잡아들였는데, 태조는 이들 중 능환을 제외하고 모두를 위무하고 처자식과 함께 상경(上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능환은 신검 즉위의 주모자로 처벌되고, 견훤도 얼마 안 된 9월 8일 황산의 불사(佛舍)에서 70세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태조는 마침내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전설]
1) 여진나루
태조는 냉산의 숭신산성에 진을 치고 낙동강 건너의 견훤진(甄萱鎭)을 수없이 공격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혹 견훤이 활을 맞고 기진하여도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원기 왕성해져 다시 대항해 오니 당할 길이 없었다. 그때 지나가던 어떤 기인이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化身)이니 물위에 소금을 수백 가마니 풀어놓고 싸우면 못 견딜 것입니다. 그때 돌격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하는 말에 따라 밤에 소금을 풀었디. 견훤이 그것을 모르고 물에 들어갔다가 달아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견훤과의 접전에서 승리하게 됨에 “저 나루는 모두 나의 나루이니라.”라고 한 것을 여진(余津)으로 기록하였다 한다.
2) 숭신산성
일선의 냉산에서 일선김씨의 시조인 김선궁(金宣弓)과 해평김씨의 시조인 김훤술(金萱術) 등 지략이 뛰어난 장수가 나타나 태조를 도와 냉산에 성을 쌓으니 이를 숭신산성이라 한다. 냉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선산부(善山府)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도리사(桃李寺)도 이 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조의 개태사(開泰寺) 기원문에도 병신년 가을 숭신성에서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숭신산성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 있다.
3) 칠창리
냉산 아래 해평면 낙산리 일대에는 군창을 7개나 지어 군량을 비축해 놓고 장기전을 꾀한 데서 칠창리라고 부른다. 지금은 칠창마을이 남아 있으며 칠창지가 마을 앞에 만들어져 있다.
4) 태조산
선산부(善山府)의 동쪽 13리에 있는 산으로 태조가 후백제를 정복할 때 말을 멈춘[駐蹕]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5) 어성정
태조산의 북쪽 5리 정도에 있는 작은 산 위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말을 멈춘 곳으로, 터가 남아 있다. 나무 한 그루에 잎만 듬성듬성해서[童童] 바라보니 수레뚜껑 같다고 하였다. 속칭으로 어성정(御城亭)이라 한다.
[의의와 평가]
이 전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왕건은 냉산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후백제군은 반대편에 진을 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리천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