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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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銀行大邱支店爆彈事件 |
영어의미역 | The Bombing of Daegu Branch of Joseon Ban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발물을 배달시켜 폭발토록 만든 사건.
[역사적 배경]
3·1운동에 나타난 만세시위 위주의 평화적·수세적 방식으로는 독립이 요원해지자, 1920년대에는 독립운동이 행동적·공세적인 방식으로 변해갔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많은 비밀결사체가 조직되고, 독립운동의 전선도 사상이나 이념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사건은 이 시기 국내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의열투쟁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목적]
장진홍(張鎭弘, 1895~1930)은 1920년대 국내에서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이 강화되면서 더욱 가혹해진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기 위하여 의열투쟁을 일으켰다.
[발단]
장진홍은 1926년 1월 경성에서 친구였던 이내성(李乃成)을 만나 국제공산당의 입당을 권유받았으며, 이에 찬성하자 1927년 4월경 경상북도 경산군 사정동에서 국제공산당원인 일본인 사부로[堀切茂三郞]를 소개받았다. 이해 6월 영천에서 그를 다시 만나 그로부터 폭탄 제조법을 전수받고, 결행자금으로 50원과 국제공산당 결사대원증을 받았다.
[경과]
장진홍은 1927년 6월 영천의 박문선(朴文善)을 통해 약용으로 쓴다고 말하고 세 차례에 걸쳐 다이너마이트의 뇌관과 도화선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폭탄을 제조하여 1927년 8월 인동 옥계동 자택 부근의 시루봉 아래 흥안골에서 폭발 실험을 하였다. 그는 거사 목표로 경상북도지사, 경상북도경찰부장,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의 네 곳으로 정하였다.
1927년 10월 17일 자전거에 폭탄을 싣고서 인동에서 출발하여 다부를 거쳐 오후 대구 달성에 있는 매형 김상한(金商翰)의 집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아침 대구 화전동에 있는 덕흥여관(德興旅館)에서 선물을 가장한 폭탄을 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에게 전하고 조선은행, 경상북도지사, 식산은행, 경북경찰부장 순서로 배달토록 하였다.
박노선은 가장 먼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배달하였는데 은행원이 상자 속에서 화약 냄새가 나자 풀어서 도화선을 끊어버려 폭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상자를 은행 앞 길에 내놓았는데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순경들이 나머지 상자에 있던 도화선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1시 40분경 차례로 폭발하여 일본 경찰 4명과 은행 심부름꾼 1명, 행인 1명 등 모두 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또한 은행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결과]
장진홍은 폭발사건 후 포위망을 좁혀오자 1928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 살고 있던 동생 장의환(張義煥)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1929년 2월 14일 조선인 친일 경찰인 최석현(崔錫鉉) 등 대구에서 파견된 경찰들에 의해 오사카시 토조쿠[東城區] 이카이마치(猪飼町)에서 체포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4월 24일 대구 지방법원 복심원에서 사형 언도가 내려졌다. 항소하였으나 1930년 7월 2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기각되자, 사형 집행일 하루 전날인 1930년 7월 31일 그동안 모아왔던 수면제를 먹고 대구형무소에서 자결하였다.
[의의와 평가]
장진홍의 의열투쟁은 1920년대 말 국내에서 무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 의열단체와는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의거를 전개하였다는 점, 광복단 투쟁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환하여 폭파사건을 전개하였다는 점, 국제공산당의 연계 위에 활동을 전개하였던 점 등에서 주목을 끈다. 장진홍에 대해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는 충의는 해와 달을 꿰뚫고 아름다운 이름은 죽백에 남기게 되었다고 찬양하였으며, 전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은 애국의 귀감(龜鑑)이 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