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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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井面南原梁氏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두헌 |
소재지 | 개정면 남원양씨 집성촌 - 군산시 개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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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집성촌 |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에 있는 남원 양씨 집성촌.
[개설]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서수면, 옥서면, 개정면, 대야면, 성산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남원양씨들은 고려가 멸망하자 옥구현 동면 풍촌리에 입거한, 삼중대광(三重大匡) 우정승(右政丞)을 지낸 양의생(梁宜生)[남원 양씨 시조의 7세손]의 후손들이다.
[명칭 유래]
통사리는 임피군 서삼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산리, 능동리, 동화리, 대봉리의 각 일부와, 남산면의 우덕리, 우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통사리라 하고 개정면에 편입되었다.
[형성 및 변천]
남원양씨 시조 양주운(梁朱雲)의 7세손인 양의생(梁宜生)은 고려조(高麗朝)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삼중대광 우정승 겸 판위위시사에 이르렀다. 고려 말에 국세가 기울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뜻을 같이 하는 8명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남쪽의 옥구현 동쪽 풍촌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자취를 감추었다. 양의생이 고려 말에 옥구현 풍촌리에 입거한 이후 양의생의 후손들이 개정면 통사리를 중심으로, 서수면 서수리·마룡리, 옥서면 옥봉리·선연리, 대야면 지경리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양의생의 아들 양권(梁權)은 1401년(태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홍문관 교리, 이조 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양권이 이조 판서를 지냈다는 이유로 후손들은 자신들을 남원양씨 이조판서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현황]
1990년에 발간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의하면 당시 서수면 서수리 일대에 남원양씨가 11가구 44명, 마룡리 일대에 18가구 69명, 옥서면 옥봉리 일대에 11가구 44명, 선연리 일대에 10가구 42명, 개정면 통사리 일대에 69가구 289명[동화 마을 15가구 50명, 능동2 마을 11가구 54명, 거산 마을 12가구 36명, 신장산 마을 13가구 69명, 우산 마을 5가구 22명, 신동화1 마을 5가구 22명, 장산 마을 8가구 36명], 대야면 지경리 일대에 15가구 55명[내상 마을 3가구 5명, 백마 마을 6가구 23명, 동만자 마을 6가구 27명], 둔덕리 대동 마을에 30가구 150명이 각각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조사된 사례가 없어 정확한 현황을 파악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