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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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內廂城址 |
영어공식명칭 | Gonesang the site of a Castle |
이칭/별칭 | 고병영성(古兵營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로85번길 10[송정동 152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철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9년 3월 20일 - 고내상성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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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고내상성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로85번길 10[송정동 1520] 일대 |
성격 | 터 |
지정 면적 | 170m[길이]|8.5m[폭]|1.45m[높이] |
문화재 지정 번호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 |
[정의]
광주광역시의 송정리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석축 성터.
[개설]
광주광역시 고내상성지(古內廂城址)는 1397년(태조 6년) 전라도 병영(兵營)을 설치하면서 쌓았다가 1417년(태종 17년)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옮기면서 사용하지 않은 성으로 고병영성(古兵營城)이라고도 불렀다. 고병영성과 관련된 지명이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는데, 광주비행장의 활주로는 뽕나무밭이 있었기 때문에 '성안엣들’이라 불렀고, 고내상(古內廂) 서쪽의 들을 ‘성너맷들’이라고 불렀으며, 특히, 광주비행장 서쪽은 '고내상'이라 불리는 마을이 남아 있다. '고내상'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도절제사(都節制使)의 군영(軍營)을 내상(內廂)이라고 불렀는데 옛날 그 자리에 내상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고내상성지와 관련된 자료로는 광주 지역 토착 세력인 보성선씨(寶城宣氏)의 『대동보(大東譜)』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육지와 해상에서 맹활약한 선거이(宣居怡)[1550~1598] 장군의 차남 해생(海生)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광주비행장 담 쪽에 용보(龍甫)마을 유래비(由來碑)가 서 있는데 "마을 앞에는 꼬시란미, 진거리, 성너매, 해도리 방죽 등의 넓은 들녘이 있어 사시사철 농산물이 풍부하고 인심이 후하여 큰 마을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1964년 1월 광주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많은 부지가 편입되어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돌로 쌓은 성으로 성벽(城壁)의 둘레가 1,661척[503m]이라 기록되어 있어 처음에는 돌로 쌓았음을 알 수 있으나,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지고 송정동 일대에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 일부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흙과 돌로 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부터 50~60년 전만 해도 토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도시계획과 주위에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남는 땅을 밭으로 사용하면서 고내상과 관련된 전설과 약간의 흔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위치]
고내상성지는 송정역숲안애2차아파트 단지 내에 해당한다.
[현황]
1989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지정 당시 남아 있던 고내상성지는 길이 170m, 폭 8.5m, 높이 1.45m로, 흙을 일정한 두께로 다져가면서 쌓은 것으로 보아 고내상성의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내상성지는 도시 계획 및 개발의 결과로 2023년 현재 그 유허만이 남아있다.
[의의와 평가]
광주광역시에는 삼국 시대 축성된 무진고성만 남아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광주의 외곽인 송정리 근처에 흙과 돌로 된 또 하나의 고내상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과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성의 본 모습은 모두 훼손된 상태이다. 고내상성의 완전한 복원은 어렵다 하더라도 일부만이라도 복원한다면 선현들의 축성 기술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