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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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선사,고대,고려,조선,근대,현대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전라남도 해남 지역과 관련된 역사.
[개설]
해남군의 역사는 구석기로 올라간다. 고대에는 고대 연안 해로와 관련하여 신미제국의 중심인 침미다례(忱彌多禮), 지미(止迷), 침명현(浸溟縣)으로 이어진다. 고려에 들어와 해남현(海南縣)이 등장하고 지금의 산이면 진산리 청자 가마터[사적 제310호 해남 진산리 청자 요지(海南珍山里靑磁窯址)]와 화원면 신덕리 청자 가마터[전라남도 기념물 제220호 해남 화원면 청자 요지(海南花源面靑瓷窯址)]가 황원군(黃原郡)에서 운영되었다. 조선 초기에 왜구로 인하여 진도와 병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라 하였다가 분리하여 지금의 해남읍으로 치소를 옮기었다. 1440년에 우수영에 전라수영이 옮겨오고, 1445년에는 화원반도에 목장이 설치되었다. 1447년에는 옥천면 일대, 1448년에는 화원반도 일대가 영암군에서 해남현으로 이속되었다. 1555년 달량진왜변, 1597년 명량대첩은 왜와 관련된 사건이다. 북평과 송지 지역은 1906년에야 영암군에서 해남군으로 편성되었다.
[선사]
해남 지역에서의 인류의 탄생은 기원전 2000~1000년 사이에 조성된 신석기시대 후기의 현산면 두모리 패총을 시작으로 보아 왔었으나, 2002년 해남 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이헌종 교수팀에 의해 해남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이었으며, 산이면 구성리와 덕송리, 대진리, 문내면 충평리, 화원면 성산리, 개초리 일대 등 넓은 지역에서 수습되었다. 화원과 산이, 문내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물은 몸돌과 소형 양면찍개, 긁개, 돌창 등이다. 이로 인하여 해남의 인류 역사는 신석기시대에서 구석기시대로 소급하게 되었다. 2002년 발견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주로 해안가에서 발견되고 있어 당시 구석기인들은 바다를 중심으로 먹을 것을 구하며 이동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전 세계 8만여 기 가운데 1%인 831여 기가 해남군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해남의 고인돌은 대체적으로 산이, 마산, 화산, 현산, 송지, 화원 지역 해안선을 따라 위치한다. 대표적으로 화산면 연정리 고인돌군은 48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어 전라남도 기념물 제165호로, 화산면 방축리 고인돌군은 53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어 전라남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해남의 고인돌은 88개군 831기라고 확인되었다. 그동안 발견된 유물들은 반월형돌칼, 돌도끼, 돌화살촉, 돌창 등이 수습되었다. 1980년대 이후 중장비를 동원하여 임야를 개간하고 논 경지정리 사업을 하면서 산야에 흩어져 있던 많은 고인돌 상당수가 소멸되었다.
[고대]
해남 지역의 고대 역사는 우리나라 일반적인 고대 역사와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특히 삼국 시기는 일치하지 않는다. 서남단 변방에 위치하여 중앙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해남 고대 역사문화 형성은 고대 연안 해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남 고대사회 소국의 명칭은 3세기 후반에 신미제국(新彌諸國), 4세기 후반에 침미다례(忱彌多禮), 6세기 초반에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등장하는 지미(止迷), 통일신라 시기 침명현(浸溟縣), 조선시대에는 객사 이름 침명관(浸溟館)으로 전개되어 그 전통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으로 살펴본 해남 지역 고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고대 유적의 밀도가 동부권 해남반도에서는 매우 높게 나타나나 서부권의 화원반도와 산이반도는 매우 빈약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해남반도 고대 사회는 바다를 중심으로 다시 3개의 권역, 즉 백포만권, 해창만권, 북일 연안으로 나누어진다. 권역별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백포만은 철기시대의 패총이 중심이며 다수의 성곽과 고분이 분포한다. ② 해창만은 옹관고분이 주로 분포하고, 옥녀봉 토성, 그리고 용두리 전방후원형 고분이 분포한다. ③ 마지막으로 북일 연안은 전방후원형 고분 등 다양한 형태의 고총고분과 성곽이 중심을 이룬다. 6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해남 지역에는 백제의 3현(三縣)이 설치된다. 새금현(塞琴縣)[현산면 고현리], 황술현(黃述縣)[문내면 고당리], 고서이현(古西伊縣)[마산면 화내리·장촌리]이 백제 3현이다. 삼국이 통일되고 통일신라에 들어 경덕왕은 757년(경덕왕 16)에 주·군·현 간의 영속체계를 정비하고 백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토속 군현명을 한자화하였다. 해남 지역 3현의 명칭도 개명되었다. 새금현은 침명현(浸溟縣)[『고려사』 지리지에는 투빈(投濱)으로도 기록됨]으로, 황술현은 황원현(黃原縣)으로, 고서이현은 고안현(固安縣) 또는 동안현(同安縣)으로 변경되었다. 이들 3현은 강진·완도·해남 지역을 아우르는 양무군(陽武郡)에 편성되어 무주(武州)에 속하였다.
[고려시대]
후삼국이 통일이 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고려 태조는 940년에 지방의 군현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군·현명도 일부 개칭하였다. 침명현이 해남현(海南縣)으로, 황원현이 황원군(黃原郡)으로 승격되었으나 마산 지역의 동안현은 그대로 두었다. 여기에서 황원현이 황원군으로 승격된 것은 그간 별다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1990년대 후반 화원면에서 전국 최대의 초기 청자 가마터가 발견된 후, 그러한 영향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해남 지역 3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지방의 강력한 토호에 의하여 간접 지배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영속관계는 통일신라기의 강진의 양무군에서 영암군으로 변경되었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고려시대 들어 해남반도의 동부 지역, 즉 두륜산맥의 동쪽 지역이 영암군에 직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해당 지역은 옥천, 북일, 북평, 송지 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북평향, 마봉소, 송지부곡, 옥천부곡, 팔마부곡 등 향·소·부곡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 눈에 띄는 유적으로 해남 화원면 청자 요지[2004년 2월 1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20호로 지정]와 산이면 해남 진산리 청자 요지(海南珍山里靑瓷窯址)[1985년 1월 4일 사적 제310호로 지정]는 당시 전국 최대급으로 조성된 첨단 공단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조선에 들어와 1409년 해남현은 해진군이 되었다. 해진군은 해남현과 진도군를 병합한 고을명이다. 진도군은 1350년 왜구로 인하여 영암군 시종면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고향인 진도와 너무 멀다는 이유로 1409년 해남현의 옛 녹산역 터로 옮겨 온 것이다. 이어 1412년에는 해남현도 현산면 고현에서 삼산면 녹산역 터에 성을 쌓고 옮겨 왔다. 그러다가 1437년에 다시 해남현과 진도군은 나뉘어 진도군이 섬으로 옮겨 갔다. 이어 해남현도 삼산면 녹산역 터에서 지금의 해남읍으로 치소를 변경하였다. 1440년에는 무안의 당포에 있던 전라수영이 문내면 우수영으로 옮겨 왔으며, 1445년에 말 4,000필을 방목할 수 있는 황원곶에 목장을 설치하였다. 1447년에는 옥천면이 영암군에서 해남현으로 이속되고, 이어 화원반도가 1448년에 해남현으로 이속되었다. 이로써 해남현의 지경이 현재의 영역과 가장 흡사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북일면 일부는 강진현, 북평면과 송지면은 영암군에 속하였다. 1555년에 왜선 70여 척이 달량진을 침략하고 이어서 서남 해안 지역을 분탕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명량대첩을 거두면서 조선의 한양은 일본의 침략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해남현에는 약 200여 명의 종6품 현감이 파견되었다.
[근·현대]
동학농민운동이 끝나고 해남군의 지방관제는 대폭 개편이 된다. 1895년(고종 32)에 해남 연안에 설치되었던 전라우수영을 비롯한 어란진, 이진진이 혁파되고, 해남현은 해남군으로 승격이 된다. 1906년에는 진도군에 속하여 있던 삼촌면 13개 마을 그리고 강진현에 속하였던 북일면의 일부, 영암군의 북평과 송지면이 해남군에 편입되어 해남군의 영역은 비로소 지금과 유사하게 되었다. 이어 1914년 4월 1일 읍면 통폐합 시책으로 인하여 23면에서 13면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완도군의 어불도가 1921년에 해남군 송지면으로 편입되고, 1955년에는 해남면이 해남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에는 송지면 월송리가 현산면으로, 마산면 복평리는 해남읍으로 편입되었다. 1983년에 이르러 북평면에서 북일면이 분리되어 오늘날의 1읍 13개면 편제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