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98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성환·탁현진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지역에서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일어난 저항운동.

[1919년 해남의 3·1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3·1운동 소식을 접한 해남의 뜻있는 사람들도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고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4월 6일 오후 1시경 해남 장날에 맞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호응한 군민들도 1,00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해산되었으며 주동자였던 김규수(金奎秀) 등 해남공립보통학교 생도 16명은 태형 내지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았다.

한편 읍내에 거주하던 김동훈(金東勳) 또한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마을 청년들과 유지들을 규합하고, 만세 시위 날짜를 4월 11일 장날로 정하였다.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을 독려하였으며, 4월 11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 진압되었다.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에는 만세 시위가 해남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1920년 4월 21일 우수영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계획되었고, 22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우수영 읍내를 행진하였다. 학생들의 만세 소식을 들을 우수영의 유지와 주민들은 1920년 4월 23일 오후 7시경 만세 시위를 펼쳤다. 3일 후인 1920년 4월 26일 화산면에서도 만세 시위를 계획 중이니 참여하라는 격문이 붙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은 1920년대 민족운동의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남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1920년대 해남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청년운동, 농민운동이 확산되었다.

[1920년대 해남의 민족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고취된 민족의식은 민족운동의 확산으로 이어졌으며 해남 각 지역에서 청년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해남의 청년회는 해남청년회[1920년 초]를 시작으로 옥천면청년회[1920년 5월 31일, 옥천면], 신흥청년회[1920년 6월 28일, 해남면], 해창청년회[1923년 5월, 화산면], 화산청년회[1924년 10월, 화산면], 마산청년회[1925년 7월, 마산면), 이진청년회[1926년 9월, 북평면], 구성청년회[1927년 이전, 북평면], 현산청년회[1927년 1월, 현산면] 등이 있다. 해남 지역 청년회들의 결성 목적과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옥천면청년회의 결성 목적은 교풍(矯風), 근축(勤蓄)이었으며, 해남청년회는 결성 당시 수양·체육부로 조직되었고, 체육부에서는 운동회, 수양부에서는 강연회 등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다른 청년회의 결성 목적이나 활동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모두 계몽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청년운동과는 유사하지만 농민들의 소작 관계 개선과 야학 등의 계몽 활동을 목적으로 1924년경부터 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창리노농회[1924.10, 북평면]을 시작으로 서홍리노농회[1924년 10월, 북평면], 영평노농회[1924년 10월 2일, 북평면], 산이면노동조합[1927년 9월, 산이면], 해남농민회[1929년경]가 결성되었다. 이들 노동조합은 농민들과 함께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사회주의운동의 확산과 해남]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1928년 12월 테제 이후 아래로부터의 당 건설이 원칙이 되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적 노농조직 건설이 최우선 과제였다. 1930년대 해남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는 전남운동협의회를 들 수 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북평면의 김홍배(金洪培), 오문현(吳文鉉)이 완도 사회주의운동가인 황동윤, 이기홍과 함께 1933년 5월 15일 결성한 단체이다. 이들 단체는 해남·완도를 넘어 전남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지역별로 농민반이 조직되었으며, 농민야학, 노동야학 등을 담당하였고, 문맹 퇴치와 사회주의사상 교육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1933년 여름 강진에서 검거된 조직원을 심문하던 중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1934년 2월 일망타진되면서 와해되었다.

[현황과 의의]

일제강점기 해남에서는 일제에 대항하여 조국을 되찾고자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많은 선열들이 희생되었다. 일제에 항거하다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기억되지는 못했지만, 2019년 1월 현재 해남 출신 61명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해남에서는 독립운동으로 희생된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대 해남항일독립운동희생자추모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2007년부터 독립운동희생자 합동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어 2013년 7월 9일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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