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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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南鄕校 |
영어공식명칭 | Haenamhyanggy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향교길 20[수성리 105]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희태 |
건립 시기/일시 | 1482년 - 해남향교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고도리에서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로 이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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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739년 - 해남향교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에서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수성리 105 자리로 이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549년 - 해남향교대성전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44년 - 해남향교대성전,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중문을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4년 2월 29일 - 해남향교대성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7호로 지정 |
현 소재지 | 해남향교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향교길 20[수성리 105] |
성격 | 향교 |
양식 | 목조와가 |
정면 칸수 | 3칸[대성전]|5칸[명륜당]|6칸[동재]|5칸[서재] |
측면 칸수 | 3칸[대성전]|2칸[명륜당]|2칸[동재]|1칸 반[서재] |
소유자 | 해남향교 |
관리자 | 해남향교재단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수성리에 있는 조선 전기 향교.
[개설]
해남향교(海南鄕校)는 해남군 해남읍 수성리에 있는 조선 전기 향교로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한편, 지방민 교육과 교화를 책임지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교육 기관이다.
[위치]
해남향교는 해남읍 수성1리 마을회관에서 향교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200m 거리의 경사진 곳에 있다.
[변천]
해남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 교육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1482년(성종 13) 옮겨 지었으며 이후 1549년, 1611년, 1673년, 1702년, 1739년, 1816년, 1844년 등에 중개수하였다. 대성전,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제기고, 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자료로 「해남향교창수전래기(海南鄕校倉修傳來記)」에 조선시대 해남향교의 중수와 이건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412년(태종 12) 고을이 옮겨지면서 해남 현산면 향교리에서 고도지리(古道旨里)[지금의 신안리 앞]으로 이설하였고 1482년(성종 13) 구교리(舊校里)로 옮겼다. 1549년(명종 4) 을유에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550년(명종 5) 경술에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1739년(영조 15) 기미에는 현재의 수성리 위치로 이건하였다. 1844년(헌종 10) 갑진에 대성전, 내삼문[神門], 명륜당, 동재, 서재, 중문을 중수하였다. 해남향교 대성전은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7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해남향교는 경사 지형에 지어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남남서향을 정면으로 하여 일직선상에 대성전과 내삼문, 명륜당을 배치하고 있다. 내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진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정면에 누대형의 명륜당이 있고 고직사가 1동 있다. 외삼문은 중심 직선상에서 벗어나 좌측 편에 비스듬히 건립되어 있고 교직사는 강학 구역 우측 담장 밖에 별도로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집이다. 동재는 앞면 6칸, 옆면면 2칸이고 서재는 앞면 5칸, 옆면 1칸이다. 내삼문, 외삼문, 제기고 등이 있다.
[현황]
해남향교는 현재 해남 유림들의 활동 근거지로서 매년 봄, 가을에 석전제를 봉행하고 청소년들에게는 충효교실 등을 열어 교육적인 면모를 이어 가고 있다. 해남향교는 매년 지역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기로연(耆老宴) 행사를 열어 웃어른에 대한 공경과 효를 권장하며 가치관을 바로 세워 아름답고 살기좋은 사회를 이루고자 하고 있다. 또한 작명례(作名禮)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해남향교는 조선시대 교육 기관으로 해남의 문풍을 진작시키고 유림 정신을 현양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