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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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868年 漆原 農民 抗爭 |
영어공식명칭 | Chilwon Peasant Protest in 1868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1868년 지방관의 폭정에 맞서 칠원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경과]
1868년(고종 5) 가을 경상도 칠원에서 현감 조현택의 부정과 탐학(貪虐)에 대한 저항으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칠원 농민 항쟁의 직접적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칠원의 농민들은 황상기(黃上基)와 이도여, 전홍이 등의 주도 아래 통문(通文)을 돌려 동리별로 장정을 동원하였고, 이에 불응할 경우 집을 부수는 등 공동체적 의무를 강요하였다. 이렇게 동원된 수천 명의 농민들은 불법의 개선을 요구하는 등소(等訴)를 올려, 수령의 부정부패와 고을의 폐단을 혁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장에는 농민들뿐만 아니라 관속들도 참여하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아를 공격하여 현감을 군현 경계 밖으로 쫓아냈다. 또한 농민들은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석방하고, 항쟁에 참여하지 않은 마을들을 공격하였다.
[결과]
조정(朝廷)에서는 강력한 탄압 정책을 내세워 칠원 농민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이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겪으면서 농민층의 동요를 강경한 조처로 막아 보려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정권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현감 조현택은 파직되는 것에 그쳤고, 항쟁의 지도부는 모두 효수(梟首)되었으며 소극적으로 참여한 농민들과 등소에 같이 이름을 올린 관속들도 엄형(嚴刑)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주동자인 황상기의 경우, 1862년(철종 13) 농민 항쟁 당시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농민 저항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고, 이도여 또한 1862년 농민 항쟁 참가 이후 소상공인으로 생활을 전전하고 있었다. 즉, 사회 전반적으로 변혁과 저항 세력들이 형성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지배 엘리트와는 다른 농민적 지식 계급들이 등장함으로써, 당시의 농민 항쟁 운동을 보다 조직화하고 이념화하는 데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