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함안 농민 항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01
한자 1894年 咸安 農民 抗爭
영어공식명칭 Haman Uprising of 1894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월 12일연표보기 - 향민 수천 명이 동문 밖 사정에서 모여서 박용하의 첩의 집을 방화, 향리와 향민 등의 집을 부수면서 시작
성격 농민 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윤수|박용하

[정의]

1894년 1월 12일 함안 지역 향전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일어난 농민 항쟁.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사회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에 따른 양반 중심의 향촌 사회 질서가 변화해 가고 있었다. 특히 향촌 사회에서 재지 세력 사이에 각종 향권을 둘러싼 향전(鄕戰)이 발생하였다. 함안 지역의 향전은 남당과 북당의 대립에서 비롯하였다. 이는 북당인 조윤수가 반벌(班閥) 식자층 이서(吏胥)들과 결탁하여 향권을 장악하려고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조윤수가 거주하는 지역이 내대산면이었기 때문에 북당이라고 칭하였고, 조윤수의 반대파인 박용하 등이 주로 남쪽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남당이라고 불렀다. 함안의 남당과 북당의 향전은 주로 이방(吏房) 차임(差任)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경과]

함안 농민 항쟁은 1894년(고종 31) 1월 12일 향민 수천 명이 동문 밖 사정에 모여서 박용하의 첩의 집을 방화하고 향리 조익표·강태무, 향민 조익규·박영수, 좌수 조민규 등의 집을 부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항쟁 3일째에는 남당 500~700여 명이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죽창을 들고 향교촌에 난입하여 북당의 장두(狀頭)와 대치하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판하였다. 농민 항쟁의 촉발은 남당과 북당의 대립이 원인이었으나, 여기에 민중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 것은 이방의 차임과 포흠(逋欠)을 통해 결국 민중 자신들이 수탈의 대상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결과]

1894년 함안 농민 항쟁은 수령(守令)의 수탈과 일본인 상인의 침투에 따른 상업 구조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한 농민 항쟁이었으나 항쟁을 시작한지 며칠 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농민들은 수령-이향(吏鄕) 수탈 구조와 도고 상업 구조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한 농민 항쟁으로 남북당의 향전의 격화가 시발점이 되어 표출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나타냈다. 이후 이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전 거납(結錢拒納) 혹은 화적의 형태로 계속 나타나게 된다. 또한 함안 지역에서 격렬하게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동력 혹은 역사적 배경에는 함안 농민 항쟁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고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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