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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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 |
영어공식명칭 | Night Schoo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학술 강습회.
[개설]
기본적으로 야학(夜學)은 비정규적인 교육 기관에서 하는 근대 교육을 지칭한다. 1920년대 이후 야학회는 실력 양성 운동의 확산에 따라 야학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1913년 이후, 함안 지역의 경우 사립 학교와 더불어 야학이 함안 지역 내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일조하였다. 사립 학교와 야학은 함안 지역 3·1 운동의 중심적 구실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사립 학교 및 야학의 민족의식 고취와 깊은 연관이 있다.
[활동 사항]
사설 야학의 공식 명칭은 사설 학술 강습회이다. 주로 밤에 하기 때문에 통칭 야학으로 불렀다. 야학은 1913년 발표된 ‘사설 학술 강습회에 관한 건’에 따라 시행되었다. 관립(官立) 야학도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지방 행정 당국이나 공립 보통학교의 부수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주된 야학은 조선인의 주체적인 교육 운동으로 전개된 사설 학술 강습회라 할 수 있다.
야학은 1898년(고종 35) 근대 교육을 시무책으로 인식한 관리, 개신 유학자, 개화 자강론자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사회 단체나 실업가·관리·교사·상급 학교 학생 등은 무산 아동, 근로 청소년, 문맹 성인 등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교육 내용이나 설립자 성격에 따라 민족 야학과 식민 야학[일명 관제 야학]으로 나뉘는데, 민족 야학은 문맹 퇴치에 중점을 둔 계몽 야학과 독서회 같은 의식화에 중점을 둔 민중 야학으로 구분된다. 대다수는 계몽 야학이었지만 1920년대 이후 계급 의식 고취를 위한 민중 야학이나 일본어 보급과 식민 정책 홍보를 위한 식민 야학도 성행하였다. 야학회는 실력 양성 운동 확산에 따라 야학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맞았다. 계몽 단체 지회·노동 단체와 민회·민역소(民役所)·민단소(民團所)·민의소·농무회 등은 야학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노동자와 초동(樵童)이 야학회를 직접 설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1913년 1월 5일 이후 함안 지역의 각 마을에 사설 학술 강습소[야학교 포함]가 설립되어 국어, 산수, 기술, 일어 등을 가르쳤다. 함안 지역에서도 사립 학교와 야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 특히, 1919년 3·1 운동 당시 함안 지역 내에는 경명 학교, 신창 야학교, 보흥 학교[현 칠원 초등학교], 찬명 학교[현 함안 초등학교]와 함께 야학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사립 학교로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대체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당시 사립 학교 교육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또한 함안 지역 3·1 운동 당시 경명 학교와 신창 야학교 그리고 동명 학교의 역할이 컸던 것 또한 바로 이러한 민족 교육을 고취한 성과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후, 함안 지역 내에서는 1927년 문맹 퇴치를 위해 평광 출신인 이삼룡(李三龍)·이수상(李壽商)이 평광 야학교를 설립하였고, 1929년 농촌 청소년 문화 계몽과 민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동창 야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야학은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전시 체제로 돌입하여 청년 훈련소 등의 강제 교육 기관이 신설되면서 기능을 박탈당하게 된다. 함안 지역의 야학 또한 일제의 온갖 탄압을 받고 문을 닫았다. 평광 야학교의 경우, 1941년 문을 닫지만 1945년 이후 다시 야학을 개설하나 초등 의무 교육이 확대되면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동창 야학교의 경우 1935년 문을 닫고, 교사 전원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거나 투옥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