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농민 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43
한자 咸安 農民 組合
영어공식명칭 Haman Peasant Un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익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7월 16일연표보기 - 함안 농민 조합 설립
최초 설립지 함안 농민 조합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성격 농민 조합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있었던 농민 조합.

[설립 목적]

함안 농민 조합은 일제 강점기 농민의 권익 보호와 문맹 타파 및 농민 운동의 발전과 농민의 단결을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함안 농민 조합은 1926년 10월 26일 조진규, 조문극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함안 소작인 조합에서 비롯되었다. 함안 소작인 조합은 농민의 권익 보호와 문맹 퇴치를 목표로 농민 야학과 순회강연 등을 실시하였다. 이후 1927년 7월 16일에 함안 청년 회관에서 창립 대회를 개최하여 함안 소작인 조합에서 함안 농민 조합으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1931년에는 가야 농조 지부, 군북 지부 등의 설치와 함께 본격적인 활동이 진행되었고, 1935년 이후로는 일제의 농민 조합 운동에 대한 대규모 탄압으로 활동이 축소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함안 농민 조합은 100여 명의 회원과 수백 명의 청중들이 참석한 창립 대회에서 “조선 농민 대중아 단결하자” 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날 창립 대회에서는 조영대의 개회사와 조진형의 취지 설명이 있었으며 이후 일본 경찰의 경계 속에서 규약을 통과시키고 사회단체 연합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하였다. 창립 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 노동 총동맹, 하동 사회 과학 연구회의 축문 낭독도 진행되었다.

함안 농민 조합은 1931년 이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였다. 함안 농민 조합의 주된 활동은 함안 지역 내 농민 조합 지부 결성이었다. 일제의 숱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함안 농민 조합은 1931년 3월 10일에 가야 농조 지부를 설치하고 같은 시기에 군북 지부도 설치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소작인들의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는데, 진주 일신 여학교 소관을 둘러싼 소작권 이동 문제, 남해 척식 회사 함안 농장에서 발생한 비료 대금 분쟁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수의 조합 활동가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35년 이후 농민 조합 운동은 일제의 대규모적 탄압에 그 활동 폭이 축소되었다.

주요 사업으로 진주 일신 여학교 소관의 토지를 둘러싼 소작권 이동 문제에 관여하여 구작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신구 소작인 사이의 소작권 분쟁에 개입하여 소작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함안 농민 조합의 지도부가 검거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런 어려움에 불구하고 함안 농민 조합은 신구 소작인들의 소작권 분쟁 조정에 적극 앞장섰으며, 1931년 가을 남해 척식 회사 함안 농장이 소작인 700명의 비료 대금을 부당하게 계산하여 폭리를 취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사태를 수습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창준, 변면섭, 안봉중, 박승표 등 4명이 검거되고 양창준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31년 11월 지세와 모세를 주지 않도록 농민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군북 농민 조합 간부 중 조영제, 조복래, 박개순 등이 검거되었고, 적색 농민 조합 혹은 공작 위원회를 조직했다는 혐의를 받아 조휘식, 박승표, 김진국, 이석건, 조진규, 박인호, 윤석중, 이홍구 등 8명이 서울로 압송되는 고초를 겪었다.

[의의와 평가]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농민 조합 운동함안 청년 동맹에서 활동한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는 청년 동맹을 이끌던 이들이 농민 조합과 같은 대중적 단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었고, 여타의 지역과는 달리, 함안 지역에서 항일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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