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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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民 組合 |
영어공식명칭 | Peasant Un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 농민 운동 단체.
[개설]
신간회(新幹會) 해소 이후 청년 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이 대거 농민 조합 설립의 주축이 되었다.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도 함안 청년회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에 의해 함안 농민 조합이 결성되어 농민들의 권익 보호와 농민 계몽에 앞장섰다. 함안 농민 조합의 활동은 신간회 지회 해소를 전후한 1931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노동 야학을 운영하면서 문맹 타파와 농민 훈련에 매진하였다. 또한 함안 농민 조합은 소작인들의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는데, 진주 일신 여학교 소관을 둘러싼 소작권 이동 문제, 남해 척식 회사 함안 농장에서 발생한 비료 대금 분쟁에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변천]
경상남도 함안에서의 농민 조합 운동의 시발점은 기존의 함안 청년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진규(趙珍奎), 조문극 등 외 26명이 가야면말산 서당(末山書堂)에서 함안 소작인 조합 결성을 위한 사전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이후 핵심 인사들이 1926년 10월 26일 같은 장소에서 출석 회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함안 소작인 조합을 결성하였다. 함안 소작인 조합은 1927년 6월 회원 2,000여 명을 확보하고, 함안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1927년 7월 16일 함안 소작인 조합은 함안 농민 조합으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박승표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던 함안 청년 동맹 가야 지부에서는 1931년 1월 초부터 가야 농민 조합을 결성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청년 동맹원들은 농민 조합을 설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함안 경찰서에 소환되었다. 같은 시기 함안 농민 조합은 군북면에도 군북 지부를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함안 경찰서의 간섭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러한 일제 탄압 속에서도 함안 농민 조합은 1931년 3월 10일에 가야 농민 조합 지부와 군북 지부를 설치하였다. 가야 농민 조합 지부의 집행 위원장은 김진국, 이석건, 박승표, 안창수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청년 동맹과 신간회에서 활동하였던 핵심 인물들이었다.
1931년 가을에 남해 척식 회사 함안 농장에서 소작인들에게 비료 대금을 부당한 방법으로 수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함안 농민 조합에서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창준, 변면섭, 안봉중, 박승표 등 다수의 조합 활동가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뿐 아니라 1931년 11월에는 군북 농민 조합 간부 중 농민들에게 지세와 모세를 주지 못하도록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조영제, 조복래, 박개순 등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활동가들의 잦은 검거와 탄압은 농민 조합에 악영향을 주었다. 1935년 이후 농민 조합 운동은 일제의 대규모적 탄압으로 인해 그 활동 폭이 축소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농민 조합 운동은 함안 청년 동맹에서 활동한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는 청년 동맹을 이끌던 이들이 농민 조합과 같은 대중적 단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뜻하고, 다른 지역과는 달리, 농민 조합 운동은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항일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1931년 신간회 해소 이후 사회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