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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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悅里 陶器 - |
영어공식명칭 | Kiln Site in Okryeol-ri |
이칭/별칭 | 옥렬리 도요지,옥열리 도기 가마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 산6|옥렬리 1399-1|옥렬리 33|옥렬리 90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성우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도기 가마터.
[변천]
옥렬리 도기 가마터는 조선 시대에 운영되었던 도기 가마터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에는 많은 도기 가마터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중 분포가 많은 곳 가운데 하나가 옥렬리이다. 『함주지(咸州誌)』 총담조(叢談條)에 "본 군에는 본래 옹기 굽는 사람이 없었다. 직제학 어변갑(魚變甲)이 진주 목사와 친한데 어느 날 쌍륙놀이로 옹기장이 몇 가구를 따 왔다. 그 후로 자손이 번성하여 대대로 대산리에 살고 장정은 군역에 면제되고 옹기업에만 전력하였는데 마을 이름도 옹점이라 하여 동업자만 살아왔다[咸郡初無甕匠魚直提學變甲與晉山牧伯相善一日局睹得數戶而來後子孫繁盛世居于代山里雖有 壯丁不充卒伍因稱所居村曰甕店 店無他戶焉]"고 기록되어 있어 함안군 대산면 일대에 옹기업에만 종사하는 특수 목적을 가진 집단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가마의 벽체가 확인되는 부분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어졌다고 한다.
[위치]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 서쪽 끝에 독점[옹점]이라는 지명의 마을이 존재하는데, 이곳에서 두 곳의 가마터가 확인되어 『함주지』의 기록과 가장 잘 부합되는 곳으로 추측된다. 유물이 채집된 지역에 따라 옥렬리 도기 가마터Ⅰ~옥렬리 도기 가마터Ⅳ로 나누어진다. 옥렬리 도기 가마터Ⅰ은 독점 마을 옥렬 저수지 북쪽 경작지에 해당하는 지역에, 옥렬리 도기 가마터Ⅱ는 터등산[201.8m]에서 남쪽으로 뻗은 비탈이 형성한 작은 곡간에, 옥렬리 도기 가마터Ⅲ은 독점 마을 앞쪽에 형성된 옥렬 저수지 남쪽 묘역 인근에, 옥렬리 도기 가마터Ⅳ는 소이열 마을 사이로 개설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마을 끝에 구봉재가 있는데 구봉재 안쪽 곡부 일대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6년에 창원 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함안군』 제작을 위하여 실시한 지표 조사에서 옥렬리 도기 가마터가 밝혀졌다. 지표 조사 결과 네 곳의 도기 가마터가 확인되었으며, 다량의 벽체편과 자기편, 도기편이 채집되었다.
[현황]
옥렬리 도기 가마터Ⅰ은 경작지 전역에서 다량의 벽체 시설과 소토(燒土), 자기편들이 확인되고 있어 가마터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형적으로 볼 때 가마는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오름 가마로 추정된다. 옥렬리 도기 가마터Ⅱ에는 자기편과 소토, 벽체편이 노출되어 있었다. 채집된 자기는 사발[완(碗)]이나 접시가 대부분이며 분청사기도 일부 존재한다.
옥렬리 도기 가마터Ⅲ은 최근 묘역 조성 작업으로 인해 비탈 하단부가 절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가마터가 노출되었다. 유적은 묘역 전역에서 확인되는데 다량의 자기편을 비롯하여 소토와 벽체가 노출되었다. 옥렬리 도기 가마터Ⅳ에서는 소토와 벽체도 확인되며 간혹 중세기~근세의 도기편도 채집된다. 수풀이 우거져 정확한 양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과거 경작으로 인하여 유적의 상당 부분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함주지』에도 언급되어 있는 옥렬리 도기 가마터에 대한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져 가마의 규모와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당시 생활 문화 등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