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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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珍奎 |
영어공식명칭 | Jo Jingyu |
이칭/별칭 | 조한규(趙漢奎),국필(國弼),퇴우(退憂)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고은영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
[개설]
함안 지역은 일제 식민지 지배 체제에서 독립운동이 힘차게 지속적으로 일어난 지역이다. 1919년 함안읍 만세 운동, 군북 시장 만세 운동 등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1920년대에는 함안 형평사, 신간회 함안 지회 등을 통한 항일 사회 문화 활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농민 조합 등을 통한 반일 활동도 빈번하였다.
[가계]
조진규(趙珍奎)[1904~1941]는 초휘(初諱)는 조한규(趙漢奎), 자(字)는 국필(國弼), 호는 퇴우(退憂)이다. 아들은 조용태(趙鏞泰)이고, 손자는 조금세(趙金世)·조민제(趙敏濟)·조찬제(趙贊濟)·조신제(趙信濟)이다. 증손자는 조홍래(趙洪來)이다.
[활동 사항]
조진규는 1904년 9월 15일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서 태어났다. 16세의 나이로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38세로 작고할 때까지 다양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과 함께 함안 경찰 주재소 및 함안 등기소 등에 돌을 던지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후 동아일보사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함안 형평사 창립 임시 의장, 함안 소작인 조합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착취와 탄압을 막아 내고 주민 계도에 앞장섰다.
1924년 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고, 1926년 6·10 만세 운동 때에는 예비 검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7년 상해 독립단경남 대표로 선임되어 안재홍(安在鴻)과 대한 독립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석건, 조한휘(趙漢輝)와 함께 신간회 함안 지회를 결성하고 농민 조합도 만들어 항일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31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당에 입당하고, 1935년 나진·웅기 등지에서 노동 쟁의를 주도하다 신징[新京]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귀국하였다. 옥살이와 울분이 병이 되어 1941년 8월 10일 38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상훈과 추모]
1981년 4월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조진규 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2018년 8월 15일에 2018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