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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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安邑 萬歲 運動 |
영어공식명칭 | Hamanup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함안읍 의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승 |
[정의]
1919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함안군 읍내 장날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함안의 3·1 운동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규모와 만세 운동 횟수에서 최대 규모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월 9일 칠북면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경상남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3·1 운동이었다. 이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이어서 3월 23일과 4월 3일·8일·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4일간 연속적으로 모두 11회, 1만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그 결과 삼남(三南)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낳았으며 일본 군경에 의한 피해 또한 전국 1위였다. 이를 통해 함안 지역의 3·1 운동이 매우 격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9일의 여항면의 동명 학교 교사인 박건병(朴鍵秉)·강기수(姜琪秀)와 유림들이 고종(高宗) 황제의 장례식에 참가하여 서울에서 전개된 3·1 운동에 자극을 받아 함안읍 만세 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경과]
1919년 고종 황제가 승하(昇遐)하자 함안의 많은 지사들 중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조문국(趙文國)·박건병·강기수·한관열 등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3월 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이들은 3월 5일 고향으로 돌아와서 봉성동의 곽종한(郭鍾漢)·한종헌(韓鍾憲), 검암리의 이희석(李喜錫), 여항면의 박노일(朴魯一) 등과 모의하여 함안읍 장날인 3월 19일[음력 2월 18일]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한학 훈장이던 안지호(安知鎬)를 고문으로 하고 태극기 제작은 한종헌·조한국(趙漢國)·김도권(金道權) 등이 맡고 독립 선언서 등사는 이찬영·이희석·조한휘 등이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 선언서를 기초로 마련하였다. 마침내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올린 주동자들은 계획하였던 대로 태평루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가운데 이희석의 낭독을 시작으로 장날 모인 3,000여 명의 군중들과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일제의 탄압에 맞서 만세 운동에 참가한 군중들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돌을 던지면서 주재소를 6회에 걸쳐 습격하고 우체국의 통신을 마비시키는 한편 등기소 등 일제 침략의 말단 기관들을 파괴하였다. 특히 함안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선두에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함으로써 다음날 군북 시장 만세 운동에 5,000명의 군중을 동원하는 선전 효과를 낳았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시위 과정에서 대한 국민이 독립을 청원하는 시위를 하였다는 사실 증명서를 마산 경찰 서장에게 받아 프랑스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운동이었다.
[의의와 평가]
함안읍 만세 운동은 만세 운동 주동자를 비롯해 참가자들 중 63명이 마산 지방 법원 원심에 회부되었을 정도로 참가 인원이 많았고 시위 양상이 격렬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의거와 차별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