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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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漆原面 龜城里 市場 萬歲 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Chilwonmyeon Guseongni Marcket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칠원 장날 의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승 |
[정의]
1919년 3월 23일과 4월 3일·8일·13일 4회에 걸쳐 경상남도 함안군칠원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함안의 3·1 운동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규모와 만세 운동 횟수에서 최대 규모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월 9일 칠북면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경상남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3·1 운동이었다. 이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이어서 3월 23일, 4월 3일, 4월 8일, 4월 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4일간 연속적으로 모두 11회, 1만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그 결과 삼남(三南)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낳았으며 일본 군경에 의한 피해 또한 전국 1위였다.
[역사적 배경]
함안군 칠원면은 전통적으로 칠원 향교(漆原鄕校)가 있어 유림들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개화 물결과 함께 기독교가 일찍부터 보급되어 기독교인들 또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주동자 중 한 명인 이갑성(李甲成)은 칠원면의 기독교인 손종일(孫鍾一)과 박순익(朴順益)에게 사람을 보내 서울에서 전개될 3·1 운동의 소식을 알렸다. 이에 손종일과 박순익은 칠원면3·1 운동을 모의하였다. 그 과정에서 손종일과 박순익은 칠원면을 대표하던 밀양 박씨·창원 황씨·상주 주씨·영산 신씨·김해 김씨 등의 각 문중 유림들과 손을 잡고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의 거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경과]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은 기독교 장로이면서 지역의 유지이던 손종일, 각 가문을 대표한 엄주신(嚴柱信)·박경천(朴敬天)·윤사문(尹士文)·박순익·김상률(金相律)·정영보(鄭泳普)·황대수(黃大秀)·주영호(周泳鎬)·신영경(辛泳慶)·윤형규(尹兄珪)·황영환(黃英煥) 등이 비밀 모임을 거듭한 끝에 칠원 장날인 1919년 3월 23일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칠원면 용산리 깊은 산중에 있었던 가장정(佳藏亭)에서 독립 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준비를 완료한 지도부는 마침내 1919년 3월 23일 오후 4시 무렵 칠원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손종일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결과]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에 앞서 이미 함안 군내에서는 여러 곳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마산 경찰서는 군내에서 더 이상의 만세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칠원 경찰 주재소에 이미 많은 경찰 병력을 증원해 두었다. 그 결과 칠원면의 제1차 만세 운동은 폭압적인 일제의 탄압으로 장시간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제1차 만세 운동으로 신영경·신영수 형제를 비롯해 황영환 등이 검거되었기 때문에 시위에 참가한 300여 명의 군중은 당일 9시 칠원 경찰 주재소에 몰려가 검거된 지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오히려 윤사문마저 체포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여기에 격분한 지도부와 군중들은 제2차 만세 운동을 장날인 4월 3일 오후 3시 일으켰다.
제2차 만세 운동 때는 제1차 만세 운동 때보다 더 많은 1,300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대수·이원식(李元植) 등이 구속되지만 오후 5시 해산하였던 제2차 만세 운동 참가자 800여 명은 재차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내를 누빈 후 칠원 경찰 주재소에 몰려들어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제2차 만세 운동으로 손종일·엄주신·박순익·김사률·정영보·박경천·윤형규 등이 체포되자 시위 군중들은 당시 친일 면장이었던 김보한(金寶漢)의 집을 습격하는 등 만세 운동의 열기를 더 높였으나 또 다시 주영호·김두량(金斗良) 등이 체포되면서 제2차 만세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은 제1·제2차 만세 운동에 그치지 않고 이후 4월 8일, 4월 13일까지 전체 4회에 걸쳐 계속해서 일어났다.
[의의와 평가]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은 함안군에서 가장 늦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1차 만세 운동이 일어난 3월 23일 이후 3회에 걸쳐 만세 운동이 더 일어남으로써 총 4회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은 여러 차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함안은 물론이고 전국의 다른 지역 만세 운동과 차별성을 지닌 역사적 특징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