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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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漆北面 二靈里 延開 場터 萬歲 運動 |
영어공식명칭 | Chilbuk-myeon Iryeong-ri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1919년 3월 9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은 배동석의 역할이 주요하였다. 배동석은 이령 교회의 장로 김세민의 장녀인 김복남과 혼인하였고, 김세민의 아들 김정오와는 처남 매부 간이다. 배동석은 서울 학생층의 주요 인사로서 민족 대표 진영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함안을 비롯한 경상남도 지역 인사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고양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배동석이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를 방문한 뒤, 김세민은 지역 주민과 함께 고종(高宗)의 장례식에 참가하여 서울의 독립운동을 직접 목도하였다. 이들은 귀향하여 함안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경과]
1919년 3월 9일에 열린 이령리 만세 시위운동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문헌 근거를 발견할 수는 없다. 다만 1976년 마을 주민들이 세운 3·1 운동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들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 1919년 3월 6일 김세민 등 29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령 교회에서 만세 시위의 사전 모임을 갖고 3월 9일 연개 장날에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9일 정오에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였고, 이어서 김정오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경명 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서서 연개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시위는 저녁 무렵까지 계속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령리 만세 시위운동의 주축은 이령 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개신교 신자들의 자제들이 상경하여 서울의 독립운동의 상황을 직접 목격하거나 참가하였고, 이들이 귀향하여 지역 주민과 긴밀히 연계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3월 9일 연개 장터 시위는 인근 지역의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타 지역의 시위는 대체로 면내 단일 시위로 끝난 반면에 함안 지역의 시위운동은 참여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하다. 즉, 함안군 시위의 특징은 한 동리 혹은 면의 고립적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동리와 동리 혹은 면과 면이 상호 연계하여 거사를 일으켰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