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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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巖壽 |
이칭/별칭 | 응룡(應龍),창랑(滄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동교 |
출생 시기/일시 | 1534년 - 정암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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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정암수 진사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94년 - 정암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55년 - 정암수 정려 |
출생지 | 정암수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
묘소 | 정암수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중산 |
정자 | 창랑정(滄浪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창원(昌原) |
[정의]
조선 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응룡(應龍), 호는 창랑(滄浪). 창원군(昌原君) 정관(丁寬)의 후예이고 할아버지는 정세원(丁世遠)이고, 아버지는 정진(丁晉)이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옥명(金沃命)의 딸이고 부인은 강화 봉씨(江華奉氏) 봉곤(奉鵾)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암수(丁巖壽)[1534~1594]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컸으며 학문에 뜻을 두어 독서한 내용은 반드시 실천하였다.
1561년(명종 16)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에 창랑정(滄浪亭)을 짓고, 정철(鄭澈)·정구(鄭逑)·고경명(高敬命) 등과 시문을 지었다.
정여립(鄭汝立)의 기축 옥사가 일어나자, 1589년(선조 22) 12월에 박천정(朴天挺)·박대붕(朴大鵬)·임윤성(任尹聖)·김승서(金承緖)·양산룡(梁山龍)·이경남(李慶男)·김응회(金應會)·유사경(柳思敬)·유영(柳瑛) 등과 연명하여 이산해(李山海)·정언신(鄭彦信)·정인홍(鄭仁弘)·유성룡(柳成龍) 등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인(姦人)이며 역당이므로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상소를 본 선조는 연명한 사람 모두를 잡아들일 수 없으니 정암수를 포함하여 10명만을 추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이 뜻을 모으고 태학생(太學生)들도 정암수를 탄원하는 상소를 올려 구원 받았다.
임진왜란에는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여했으며, 고경명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효행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자 그 옆에서 밤낮없이 시중을 들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자 3년을 시묘하였다. 1655년(효종 6)에 효행을 표창하여 정려를 내렸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창랑 유집(滄浪遺集)』 1책을 남겼는데 후손들이 송병선(宋秉璿)의 서문을 받아 1897년에 간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중산(中山)에 있다.